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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Aug 16. 2021

아무튼 처음

자기 책을 만드는 어린이와 함께 하는 일 3

행복한 글쓰기, 작가가 되고 싶다면 등등. 몇 권의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린이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는 방법, 그림책을 만드는 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이다. 책은 재미있었다. 한쪽 눈은 초록색, 한쪽 눈은 붉은색의 누군가를 만난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상상을 하면서 혼자 킥킥 대기도 했다. 주인공 캐릭터는 어떻게 잡아야 할지, 시련이 주인공을 힘들게 해도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진진해지는지, 배경은 어떤지, 문장은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마무리하는 법. 그래 아이들과 이렇게 해봐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계획.


색종이와 가위로 무한의 나무 만들기, 눈을 감고 자기 손 그리기, 1분 조각상 되기. 아이들의 감각을 활짝 열리게 만드는 교육 방법이라면 많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를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아닌 나를 대상으로 해보기도 했던 방법이었다. 몰두, 집중, 신선함, 긴장 끝에 찾아오는 탄성, 재미있었다. 연극놀이도 괜찮은데, 보자기가 어떻게 무한 변신할 수 있는지, 매일 놀던 방이 큰 배로 바뀌었지 좋아, 이것도.  아이들과 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거리들은 많았다.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 두 번째 계획.


첫 번째 계획과 두 번째 계획 말고도 많았다. 그림책을 읽어줘야지. 틈틈이 옛날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림이라면 새로운 재료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봐야지. 먹물은 안 되겠지, 교사가 감당을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아카시아 펜 색감이 너무 좋은데 등등. 내가 좋아하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작가 선생님을 초대하는 건 이 계획에 당연히 있었다. 자기 책을 만드는 어린이와 함께 하는 나는 많은 방법을 손에 쥐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라, 이 많은 방법 중에 몇 가지만 골라야 할 정도로.


하지만 현실은 역시.


"아이들과 함께 뭔가를 한다는 건, 그 뭔가가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책 만들기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획은 수정되고, 방법은 폐기되고, 아쉬워하고, 또 다른 뭔가가 있나 기웃거리고, 아 이거였구나  했다. 역시 역시였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주인공 캐릭터가 어쩌고, 등장인물이 어쩌고, 배경이 어쩌고, 인물이 여행을 하고 어쩌고 와 상관없이 종이에 쑥쑥 뭔가를 그리고, 알아보기 힘든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거침이 없었다. 그 거침없는 아이들의 그림과 글이 내 마음에 들었는지는,  고백하면 아니었다. 게임과 유튜브 먹방과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일상사와 결론 없는 추리물이 막 등장했다. 이 쯤해서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해야 하는데, 게임과 이야기의 차이를 설명해줘야겠군, 추리물은 결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빨리 이야기해야겠군, 언제 하지 언제 하지, 오늘은 누구, 내일은 누구. 매 순간 교사이자 매니저인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아이들은 허둥대지 않았다. 무얼 그릴지, 무얼 써야 할지 모르는 아이가 더 힘들어했다. 머뭇거리던 아이들도 옆 친구의 그림을 보더니 생각이 났다며 칼을 거리고 청룡을 그리느라 바빴다.   


첫 번째 계획과 두 번째 계획과 여러 계획에 담긴 적지 않은 교육 방법은 사라지거나 운 좋게 시도되거나 언젠가는 사용되겠지 하면서 계획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써라.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 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김연수 작가의 문장이다. 뭔가를 시작할 때 항상 떠올리는 문장이다. 그랬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친절한 방법과 세련되고 신기한 방법 이전에,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와 "일단 한 문장이라도 써라"가 있었다. 그 생각하지 말고 와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다는 점에서 아이들은 굉장했다. 그건 아마 아이들의 몸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처음이다.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이 그 처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재미있게 시작할 수 있도록, 몸속에 새겨진 이야기가 나오도록 도와주는 일. 그게 처음이다. 아무튼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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