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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Sep 21. 2021

떠나고 싶어요!

어린이 작가의 일 4 - 모험

"인어 마을에 도착했어요." 

"그다음에는"

"인어 마을에서 문어 동굴로 가요"

"그다음에는"

"문어 동굴에서 우주비행을 떠나요"

"그다음에는 보물을 찾지?"

"아닌데요."


어린이 작가들은 모험 이야기를 많이 쓴다. 모험, 모험, 모험. 모험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 아닌가. 그런데 어린이들의 모험 이야기는 뭔가 다르다. 모험 이야기를 쓰겠다고 하는데, '위험을 무릅쓰는'은 짧고 '어떤 일을 한다'는 더 짧다. 적지 않는 작가들은 출발과 도착, 그다음에는 행복해하고 끝이다. 보물을 찾기 위해 인어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아주 잠깐 뭔가를 하고, 또 다음에는 문어 동굴에 도착하고, 아주 잠깐의 어려움을 겪고 난 뒤, 또 우주 비행을 떠난다. 보물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매니저가 아니라 독자인 나는 감질이 난다. 보물은 어디에 있니, 이제 보물을 찾고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무지개 고양이가 맨홀에 빠진다. 계속 계속 빠진다. 맨홀의 양 옆은 계속 바뀐다. 아름다운 흙, 회색빛의 돌, 먼지가 가득한 어딘가 사이의 긴 구멍, 무지개 고양이는 계속 계속 밑으로 내려간다. 와, 도착했구나. 도착해서 어떻게 되서라고 물어보면, 간단하게 대답한다. "거긴 다른 별나라로 가는 블랙홀이었어요." 다른 별나라가 궁금해진다. 별나라는 톱니바퀴를 닮았다. 톱니바뀌를 닮은 별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뭔지 궁금해졌는데, 그걸로 끝이다. "별나라에서 재미있게 놀았어요." "응, 그다음에는" "끝이에요."


재미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나는 욕심을 내 본다. "저기 저 그림책을 봐, 뾰족산에 도착해서 본격적인 사건이 등장하잖아." 어린이 작가의 답은 시큰둥하다. "예." "주인공이 어려운 일을 겪어야 책이 재미있지 않을까?" 어린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말은 안 하지만 뭐라는지 알겠다. '간섭하지 마세요.' '나는 이걸로 충분해요.' 등등. 


옛이야기의 법칙 등등을 운운하면서 간섭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커다란 괴물을 만나서 괴물 뱃속에 들어가거나, 오징어 같은 외계인과 싸운다거나, 그래서 보물을 찾고 해피엔딩을 장식하는 모험 이야기가 완성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간섭을 받아들이고, 새 이야기를 만들면서 힘을 내기도 하고, 지겨워하기도 한다. 힘이 나든 지겨워하든 이야기는 완성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한 사람과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다를 것이라는 건, 내가 지닌 몇 안 되는 믿음이다. '애들아, 부디부디 시련 앞에서 주저앉지 말아라.'는 기원이 담긴 어른의 마음을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가끔 궁금하다. 


여하간 내 바람과 기원과 상관없이 아이들의 욕망은 명확하다. 어린이 작가들은 떠나고 싶어 한다. 밤길에 집을 나서고 싶어 하고, 주인집을 떠나고 싶어 하고, 그냥, 무작정, 특별한 이유 없이 떠나고 싶어 한다. 구박을 받아서, 욕심 많은 형들 때문에 쫓겨나서 등등의 옛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결핍을 가지고 있나 찾아보아도 드러나지 않는다. 떠나고 싶어 하고 떠나고 싶어 한다.   


어른이 쓴 동화와 어린이가 쓴 자기 이야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얼핏 알 것 같다. 어린이들은 교훈, 가치, 관념에 도통 관심이 없다. 결핍을 넘어서는 일,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용기, 삶을 견디고 세계를 살아가는 힘은 어른이 어린이에게 전하고 싶은 관념이다. 동화는 그 관념이 어린이의 경험과 감성으로 외화 되는 이야기다. 어린이의 경험과 감성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갔냐에 따라 그 동화는 좋은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지루한 잔소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린이가 자기 이야기를 직접 쓸 때는 관념은 필요 없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쓰면서 나 같은 어른의 간섭으로 생겨나기도 하지만, 첫출발은 필요 없음이다. 어린이들은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낼 뿐이다. 


나는 떠나고 싶어요! 


떠나고 싶다. 저기 다른 세계로. 맨홀에 빠져도 상관없고, 갑자기 낯선 길로 들어서도 상관없고, 바닷가에서 파도에 휩쓸려도 상관없다. 떠나면 된다. 떠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어른인 나와 너는 어떨까. 어린이에게 시련을 통과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라고 알려주고 싶어 하는 성인인 어른은 어떨까. 어른도 어쩌면 어린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미래 앞에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서 성공과 변신을 꿈꾸겠다는 의지는 관념이지 않을까. 사실은 어른도 떠나고 싶고, 떠나야 하고, 떠나면 되고, 떠나는 게 필요하고, 떠나는 일 자체가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그다음에 뭐가 등장하든, 그 끝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그게 중요한 걸까?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한다는 모험의 뜻풀이에 담긴, 저 어떤 일이란 '떠나기'가 아닐까? 

떠나는 것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아이들이 부럽다. 위험을 무릅쓰지 말고, 그냥 떠나기를 바래. 날개를 활짝 펴고 갈 수 있는 어디까지든, 떠나고 떠나고 또 떠나기를 바래. 


그렇게 나도 너희들과 같이 떠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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