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깔깔마녀 Oct 03. 2021

끝은 없지만, 끝은 끝

어린이 작가의 일 8 - 드디어 원화 완성

푸른색 지구는 아름다웠다. 사진으로 보아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직접 내 눈으로, 검은 우주의 어떤 장소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작품 완성 , 사실은 원화 완성 디데이를 세기 시작했다. 디데이 50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어린이 작가들은 숫자가 점점 작아지는 데 호들갑을 떨고, 남은 날 0이 되는 그날을 떠올리며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어딘가, 달이 되든 우주 정거장이든, 지구라는 세계에서 멀어진 내가, 푸른색 지구를 상상하며 흥분하는 그 심정과 비슷했으리라. 


우주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책을 읽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어찌 이리 복잡하고 어렵고 게다가 지저분하기 까지. 아무나 우주여행을 할 수 없다, 중력의 변화를 견뎌낼 수 있는 체력은 기본이다. 성격도 너무 예민하면 안 된다고 하니, 나는 탈락. 훈련은 말할 거도 없다. 화장실 가는 법까지 배워야 하다니. 우주인 개인의 어려움이라면 다행이다. 세계정세와 자본과 인종과 젠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돈이 엄청나게 드는 일이라 그 막후의 추악하고 난폭함은. "아, 나의 아름다운 지구는"이라는 탄식이 나온다.  


어른인 매니저에게 원화를 완성하기까지 과정은 고단하기 이를 때 없다. 노동의 고단함은 어쩔 수 없지 하고 체념하는 게 속 편하다. 어린이 작가들이 마냥 보람차고 즐겁게 원화를 완성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는 (좌식은 입식과 와식에 비해 중력의 흐름과 뭔가 어긋난 걸까, 한 번 알아볼 만하다) 일부터, 더 고쳐야 하는데, 더 그려야 하는데, 더 빼야 하는데라는 어른 매니저의 요청 사항을 듣는 일도 힘들다. 요청 사항을 수용하는 게 아니라 요청 사항을 듣는 일 그 자체다. (나도 안다. 때로는 충고, 때로는 협박, 때로는 잔소리의 요청 사항이, 어린이 작가들에게 스트레스라는 사실을. 그러나 뭐 어쩌랴. 나는 매니저, 너희는 작가인데) 첫 장에서 주인공 왕관이 보라색이었는데, 중간에 주황색으로 변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연필로 글자를 써야 하는데 볼펜으로 썼다. 그런데 맞춤법이 틀렸다. 이를 어쩌나. 모두 세로로 그렸는데, 딱 한 장만 가로로 그렸다. 이를 어쩌나. 어쩌나 어쩌나 어쩌나. 


그럼에도 당신이 당신의 몸이 지구라는 세계를 벗어나서, 중력을 거스르며 새로운 세계에 어디 곳에 위치했을 때, 그때의 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건 뭘까. 도대체 그건 뭘까. 


남은 날 0의 어느 시각에 "원화 제작 끝"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다. 정신없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작품을 다 끝냈다. 그 끝을 선언하는 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렇에 어린이 작가들은 디데이 0을 맞이했다. 


우리 이제 끝났어.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끝이다. 


정말 끝일까.


우선 원화 완성을 하지 못한 작가가 몇 있다. 그 작가들 역시 '끝'을 자축했다. (매니저인 나는 어린이 작가에게 끝 세리머니는 자신의 작품이 실제로 끝인 순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원화를 고쳐야 할 작가들은 정말 여려 명이다. 지우개질, 문장 고치기 등등.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모든 작가들이 책 표지를 만들어야 한다. 표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어린이 작가들에게는 너무너무 너무 많은 일이 남아 있다. 


두 발이 모두 우주로 떠올랐다고 해서, 저 우주인들은 지구의 굴레에서 벗어났을까. 그럴 리 없다. 마쳐야 할 임무는 얼마나 많고, 저간의 복잡한 사정은 지구에 귀환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다. 세상에 끝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조금씩 조금씩 지구로부터 멀어졌고, 멀어진 만큼 새롭게 새롭게 상상하고 시도하고 새로워지고 있다. 


어린이 작가들도 마찬가지. 끝의 그 순간, 그 순간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래서 지겹고 힘들다고 투덜거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만큼 새로운 존재가 되고 있지 않을까?


그냥 내 희망일까? 

그렇지. 매니저야 말로 이제 해야 할 일이 쌓여 있군.  

매거진의 이전글 모래알만큼,별만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