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작가의일 7 - '나'를 지키기
슬픔에 대해서라면 이게 더 슬픈 일이야, 저게 더 슬픈 일이야 하고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누군가 슬픔을 호소할 때 저 슬픔은 굉장한 슬픔이고, 저 슬픔은 빈약한 슬픔이군 판단을 하기 전에, 그 슬픔을 위로해주려고 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속으로 순위를 매기고, 판단을 하던 이가 겉으로 순위와 판단을 표현하면 눈살을 찌푸린다. 배려가 없고 예의가 없구나 하고.
서투름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받아쓰기 점수가 낮은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뒤에서 두 번째로 수학을 못하군요." 혹은 "너는 정말 글자를 못 쓰구나"하고 단정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작정하거나, 심술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게 아니라면 예의와 사려 깊은 마음을 보내고 싶어 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기쁨과 뛰어남의 영역은 그 반대다. "정말 기쁘겠군요."라는 찬사를 넘어서 "세상에 당신만큼 기쁜 사람은 없을 거예요."하고 말한다. "너 정말 잘하는구나."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써요." 칭찬과 찬사는 자연스럽게 단정과 순위와 이어지곤 한다. 왜 그럴까, 본래 슬픔도 서투름도, 기쁨과 뛰어남처럼 판단과 순위의 대상인데, 위로와 용기를 위해서 모습을 잠시 바꾼 걸까, 사람의 뇌란 그런 걸까, 인간에게 비교와 경쟁은 본능 같은 걸까, 답 없는 물음표가 가득해진다. 정말 왜 그런 걸까?
정글 모험 이야기를 그리는 어린이 작가의 첫 그림은 굉장했다. 커다란 뱀의 목구멍이 도화지 한 장에 꽉 차 있었고, 뱀의 이빨은 뾰족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대단하다." 대단한 표현에 대단하다고 하는 게 뭐 잘못은 아니지 했던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러 어른이 그 그림을 보고 칭찬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몇 명의 어린이 작가들이 감탄의 풍경을 쳐다보는 걸 알아채리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사건은 일어났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은 지워지지 않는다. 몇 개의 작품이 변하려고 했다. 정글 모험처럼 펜과 색연필로 재료가 바뀌더니, 모양은 단순하게, 색은 더 옅어졌다. 붉은색의 거친 터치가 눈에 띄던 공룡이 연한 색연필 공룡으로, 마카펜의 간결하고 대담했던 우주가 색 없는 검정과 흰색의 우주로 바뀌고 있었다.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역시, 그런 감탄을 하는 게 아니었어. 반성을 마친 나는 수습을 하느라 분주했다.
아이들, 혹은 어른들에게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건 없습니다." "잘 쓰고 못 쓰는 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꼭 이런 대응이 나온다.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건 있어요." "잘 쓰고 못 쓰는 건 있어요." 아이라면 "아니야. 모든 그림과 글은 달라."라고 반박을 하지만, 어른이라면 그냥 웃는다. 아이의 생각도 잘 못 바꾸는데, 어른의 생각을 어찌 바꾸겠다고 그런 심정이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저 말에 100퍼센트의 진심을 담지 못한다.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게 있다는 걸, 잘 쓰고 못 쓰는 게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시험처럼 정답이 없고, 점수로 등수를 낼 수는 없지만, '잘'과 '못'은 존재한다. 누구나 고흐처럼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내가 하루키처럼 정확한 메타포를 문장으로 만들 수는 없다. 절망은 아니고 씁쓸하다. 갑자기 1등밖에 기억하지 않는 어쩌고 하는 과거의 밈이 떠오른다. 1등은 아니더라도 '잘'만 기억되는 어쩌고 저쩌고.
태세를 전환하려고 한다. 침울하게 체념하듯이 잘과 못을 떠올리는 건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재미도 없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고, 내 편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나는 우리 아이들의 작품 하나하나가 다 다르게 보인다. 누구의 연필과 지우개는 몽땅하고 짧아서 응원을 해주고 싶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어지러운 글자는 그만큼 정교한 그림이랑 어울려서 미묘한 쾌감을 주고, 오일파스텔로 정성껏 그린 동물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감이 느껴지곤 한다. 정말 같은 게 없는, 이야기의 결과 그림의 표현과 다 다른 주인공의 이름에 하나하나 말을 걸 수 있다. 비슷하지도 않다. 중간중간 서로 도와주기로 하고 그림을 그려주고 사건의 전개를 알려준 흔적은 그 흔적 그대로 서로의 도움이 드러날 뿐이다.
몇 달 전에 약속을 했다. "이제 우리 잘한다는 말 하지 말자." "그럼 어떻게요?" "**이 그림을 보고 **스럽구나 하고, ^^그림을 보고 ^^답다고 하는 거지"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재미있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쩐지 잘 안 될 것 같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나부터 힘들었다. 아차, 앗, 아, 아하를 반복, 또 반복했다.
다양성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다양성은 참 어렵다. 편견과 차별은 당연히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사실에 관한 투명하고 구체적인 인식을 계속 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내 느낌과 감정의 기준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장애인을 장애가 아닌 그 사람으로 인식하고 나서도 또 남는 게 있다. 미추의느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불편의 느낌은 또 무엇인가, 나의 인식은 어디까지 명징해질 것인가, 장애뿐 아니다. 젠더와 국적과 빈곤과 질병에 관한 인식 역시 내게는 어렵다. 한 어린이 작가의 작품을 칭찬하고, 그 칭찬을 수습하느라 바빴던 것 역시 그 어려움의 하나였다.
작가 이전에 어린이인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냐고 물어본다면, 바로 대답을 할 수 있다.
"나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나다움을 실천하는 어린이요."
그리고 말을 이어갈 수 있다.
"나 다움에 관한 복잡한 배경과 맥락은 일단 뒤로 젖혀둡니다. 어린이이니까요. 어린이에게는 나다움이 우선이에요."
나다움의 그 나는 무한하다. 팽창하는 우주의 별처럼, 셀 수 없는 모래알처럼. 이 무한대의 나도 있는데, 20명 조금 넘는 '나'의 '나다움'을 지지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다고! 아자! 조금 더 분발하자!
어린이 작가들이 책을 만들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매 순간, 매 순간,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생각이 생겨날지 상상해 본다. 방 안 가득, 여기서 말주머니 하나, 저기서 말 주머니 하나, 방안 가득가득의 말주머니, 이 많은 말주머니의 그 속을 짐작하는 게 어른의 일이고, 작가 매니저의 일이다. 이 말주머니 속의 내용을 기대하는 것 역시 어른과 작가 매니저의 일이다. 이 말 주머니 안에 이런 말들이 꽉 차 있으면 좋겠다.
"나는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