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작가의 일 6 - 어린이의 세계를 떠나기
꽃을 그리는 너와 곤충을 그리는 너와 짝사랑의 아쉬움을 그리는 너에게 쓰는 편지.
처음 너희들을 만났던 장면을 기억해.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였을지도 모르지. 넌 긴 머리를 팔랑거리며 귀여운 벙어리장갑을 끼고 흙을 동그랗게 뭉치고 있었어. 낯선 나에게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어. "햄버거예요. 먹어 볼래요." 나는 벙어리장갑처럼 귀여운 네 말에 신이 나서 동그란 흙을 받고 냠냠 냠냠 열심히 먹는 시늉을 했어. 너는 또 어땠냐면, 넓고 넓은 공원에서 이렇게 숨었다 저렇게 숨었다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는 작은 아이였어. 숨었다고 하는데, 네 머리는 눈에 너무 잘 띄는 바람에 다들 알아버렸지. 그러건 말건 너는 이렇게 숨고 저렇게 숨었어. 너를 기억하는 건 내 몸이란다. 네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큰 소리로 얼마나 울어대는지, 나도 모르게 나는 너를 안았어. 나한테 찰싹 안긴 너는 계속 울고, 나는 울고 있는 너를 안고 꽤 오랫동안 걸어 다녔던 것 같아. 그때 너는 작고 가벼웠어.
이제 너희들은 그 작은 아이가 아니구나. 여전히 나한테 혼나고, 여전히 나한테 시시한 장난을 치고, 여전히 나를 흘기지만 그래도 이제 너희는 아이가 아니야. 너희들이 그리고 만드는 책을 보면서, 나는 또 한 번 이제는 어린이의 세계를 떠나려고 하거나 이미 떠나버린 너를 발견한단다.
더 이상 다른 세계를 그리지 않고
더 이상 판타지를 구현하지 않고
더 이상 앙증맞은 등장인물을 만들지 않고
이제는
사실의 세계가 기록되고 쓰이고 그려진 도화지를 바라보고 있어.
언젠가 초봄에 작은 꽃을 꺾어서 엄마에게 갖다 주겠다고 하던 너는 꽃을 그리고 있어. 분홍색과 보라색이 가득한 메꽃은 사진보다 더 정확하고 사진만큼 풍부해. 메꽃에 관한 설명을 연필로 또박또박 쓰는 너는 더 이상 흙공을 햄버거라고 말하던 아이가 아닌 게 분명해.
너의 여치와 사마귀 옆에 쓰인 글을 읽고, 나는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단다. 풀숲을 헤치며, 그 초록색 풀 사이에서 초록색 생명을 금방 알아보던 너, 어떤 사마귀가 제일 좋으냐고 묻던 너는 이제 사마귀 옆에다 글을 쓰지. 방과후 나들이에서 자주 만났던 왕사마귀. 겨울이 오고 달력이 바뀌면 너는 열네 살, 열네 살의 너는 중학생이 되고, 방과후를 졸업하겠지.
아직도 잘 우는 울면서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너, 나는 너한테 슬픔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다그치기도 하고, 울고 있는 너를 가만히 놔두기도 하지. 언제까지나 울기만 할 것 같던 네가 열세 살 소년의 짝사랑을, 그 짝사랑의 대상이 되는 붉은 머리의 소녀를 그리고, 첫사랑과 짝사랑과 그 후의 이야기를 쓰는 걸 보면서 나는 순간 당혹스러웠단다. 이제 너는 다 컸구나, 너는 말로만 소녀가 아니라 진짜 소녀가 되었구나 하고.
왜 나는 조금 아쉬운 걸까. 너희들이 어린이의 세계에 더 오랫동안 머무르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너희들이 이제 곧 나의 일상과 생활에서 비켜나가는 게 섭섭한 걸까, 그건 잘 모르겠어. 너희가 사실을 그리고 사실을 쓰고 있다는 게 가장 아쉬운 이유일지도 몰라. 어른의 세계, 이제 꿈보다 사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계에 들어서는 게 안타까울지도 몰라. 아무래도 내게 사실의 세계는 밝고 따뜻하지 않거든.
그래서 너희들에게 축복의 말을 전하고 싶어. 어떤 축복의 말을 전할까 궁리하다 <무민 골짜기의 겨울>에 등장하는 이 문장을 옮겨 적기로 했어.
"무민트롤은 오늘 밤에는 신비로운 동물들이 모두 자기들 구멍과 보금자리에서 나오리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투타키가 이야기해 준 수줍은 동물들과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동물들이 말이에요. 작은 동물들이 추위와 어둠을 몰아내려고 화톳불을 피워놓으면, 그 동물들도 죄다 거대한 화톳불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올 거예요. 이제 무민트롤도 그런 동물을 볼 수 있겠지요?"
사실의 세계에도, 너희가 막 진입하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그 세계에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동물들이 있겠지. 수줍은 동물, 작은 동물,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동물, 그 동물이 어떤 모습이든, 너희는 그 동물을 위한 화톳불을 피워놓기를 바랄게.
이제 사실의 세계에 막 진입한 너희에게 축복을, 그리고 너희의 어린이 시긴을 기억하는 나에게도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