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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Oct 10. 2021

나비처럼 우아하게, 공기처럼 가볍게

어린이 작가와 어른 매니저의 후반 작업 1 - 퇴고 작업

새삼스러운 고백. 고백이라고 하면 지인들은 다 그럴 테지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뭐 고백이라고. 


나는 어른보다 아이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른과 소통하는 것보다 아이와 소통하는 게 더 좋다. 


글쓰기 할 때 아이들에게 요구하듯이, "그렇구나 이유를 적어 봐"에 답한다면


좋은 건 좋다고, 아닌 건 아니다고 말한다.

고마운 건 고맙다고 말하고, 자랑하고 싶은 건 자랑한다.

무엇보다 사과가 통한다. 

단 저 모든 말은 영혼을 담아야 하며, 상대방을 모욕하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 


어린이 작가들과 책을 만드는 일, 그 일에서 매니저라는 직함을 받은 어른의 기쁨도 비슷하다. 좋은 건 좋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눈치 볼 것 없이, 잔 걱정 없이.(그렇다고 어른이 맘대로,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맘대로 말해도 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원화와 원고를 다 마친, 마감을 지킨 어린이 작가들은 홀가분하고 느긋하다. 하지만 어른 매니저는 지금부터 더 분주하고 압박감을 느낀다. 원고를 언제 어떻게 고치지, 편집디자인 과정에서 수정을 해도 선명해지지 않을 이 그림을 어떻게 하지, 너무 길어서 몇 장을 빼어야 하는데 괜찮을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용을 설명하는 짧게라도 덧붙여야겠다, 오만가지 계획을 하면서 책이 인쇄될 시간을 자꾸 떠올린다. 11월 중순까지 만들어야 해, 그래야 출판기념회도 하고 정산 보고도 하지라고. 

매번 느끼지만 이 쫄깃하고 초조한 시간을 누그러뜨리는 힘은 어린이한테서 나온다. 팸플릿을 만들 때도, 전시회를 준비할 때도, 어린이들은 쿨하게 어른을 맞는다. 어른인 내가 요구하고 개입하는 잔소리에 이렇게 답한다. 


"응, 그렇게 해요."

"난 상관없어요. 선생님 마음대로 해요."

"더 멋지면 좋지요."

반발도 어찌나 투명하고 빠른지 모른다.

"싫어요. 아까워요."

"나중에 별로라도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어린이들은 어찌 이럴 수 있을까. 귀찮아서? 그럴 수도 있다. 어린이의 엉덩이 지속력은 어른보다 짧다. 당연하다. 어린이는 어린이다. 어른을 믿어서? 그랬으면 좋겠다. 어린이에게 신뢰받는 어른이라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아닐 수도 있지만, 믿고 싶다. 어린이들은 어른인 나를 신뢰한다고. 

욕심이 없어서? 아닌 것 같다. 나는 욕심이 없는 어린이를 잘 모른다. 욕심을 숨기거나, 자기 욕심이 뭔지 모르는 어린이는 있어도, 내가 그동안 만난 모든 어린이는 자기 나름의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과 다른 욕심이다. 1번, 어른의 욕심이 유행과 보편성과 윤리 등등에 기대어 있다면 아이의 욕심은 생생하고 날것이라 한 아이 한 아이와 닮았다.  2번, 어른의 욕심이 복잡하고 얽혀 있고 그래서 유적 발굴의 심경으로 그의 욕심을 탐색해야 한다면, 아이의 욕심은 비교적 빨리 알아채릴 수 있다. 땅을 조금만 파도 여기저기 보물이 발견된다고나 할까. 

더 이상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들이 합쳐져서 아이들이 답한다. 그래요, 안 할래요, 그럴게요. 그러기 싫어요라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시간, 나의 합평 작업을 떠올린다. 스트레스 가득의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쓴 것 같은 작품을 공개하고 난 뒤, 돌아오는 야박한 평가도 스트레스였지만, 그 숨 막히는 공기의 흐름이 더 힘들었다. 이 긴장과 초조감을 어찌할 건가, 차라리 별로라고 말하지 저렇게 꼬아서 할 건 또 뭐냐, 쟤는 항상 남의 작품을 좋다고 말하지 사실보다 관계가 더 중요한 스타일인가 보고. 아이고, 내가 지 작품 뭐라 했다고 꼭 복수를 하는구나. 여기서 좋다고 말해놓고는 술 마시면서 또 뭐라 씹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누가 뭐라나. 

습작 합평을 해 본 사람과 못 해 본 사람으로 이 세상 사람을 두 분류로 나누고 싶을 정도의 분위기였다. 내가 등단하지 못한 이유 중 40%를 지긋지긋한 합평으로 돌리고 싶을 정도다.       


만약 나의 저 지겨웠던 합평이 어린이 작가들과 어른 매니저가 만들었던 시간과 비슷했다면,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아닌 것 같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지. 질문을 다시 해 본다. 


나는 나의 작품에 개입하고 요구하는 누군가의 말에 어린이들처럼 투명하고 솔직하게, 무엇보다 개방적이었을까? 


아니었다.  나는 투명하지도 솔직하지도 않았다. 내가 제일 잘 쓴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감정을 숨긴 채, 아닌 척 쿨한 척,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잔머리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평가가 제대로 닿을 리 없다. 평가가 가리키는 요점이 무엇인지, 둘러서 말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지닌 내용이 무엇인지, 왜 좋은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지, 저 좋게만에 담긴 마음과 감정이 무엇인지 생각했어야 했다.


역시 어른 매니저는 어린이 작가에게 배울 수밖에 없다. 배움은 다른 타인, 다른 존재에서 시작된다는 문장이 맞다면, 어린이와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르기 때문에 나는 어린이처럼 솔직하지도, 투명하지도, 개방적이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또 다른 존재로 변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김연수 작가는 토가 나올 정도로 퇴고를 거듭한다고 한다. 어린이 작가들은 토가 나오기는커녕, 나비처럼 우아하게, 공기처럼 가볍게 퇴고를 받아 들인다. 고치지 뭐, 고쳐주세요 뭐. 평화롭다. 평화롭다는 단어만큼 적절한 단어가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가볍고, 평화로워서, 매니저 어른들은 바쁘다. 이렇게 고치고, 이렇게 지우고, 이렇게 디자인하고, 이렇게 이렇게. 


그래서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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