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모든 아이들 이야기
처음에는 반반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무. 아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정확한 표현이다. 의무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의무를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반반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고르는 건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오 년 넘게 아이들을 만났다. 한 명, 한 명, 아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백 개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이 쓰고 싶었다. 글자를 모르는 아이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학교 안 문맹 문제가 드러날 거라 믿었다. 내 기억과 이해를 모두 끌어내 좋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아이들이 존엄한 존재로 대접받을 거라고 되뇌면서.
때때로 나는 무모하고 어리석다. 그래서 다행이다. 백 개의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없었다면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을 테다.
삐꺼덕, 삐꺼덕, 글을 쓰면 쓸수록 삐꺼덕거렸다. 많은 이야기도, 좋은 글도 모두 힘들었다.
한 아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아이들을 모른다.
기범이는 힘든 아이였다. 한글은 물론이고, 수업 시간 내내 혼자 떠들고, 악을 썼다. 내게 기범이는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학교 부적응 아동이었다. 그림책 <터널>을 읽어주었다. 그림책이 만, 결코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터널>에 집중했다. 그림책 읽는 시간에도 딴짓을 하던 기범이까지 <터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책을 다 읽었는데 기범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동생 있어요!”
나는 평소처럼 기범이를 대했다. 내게 기범이는 또래 아이보다 발육이 늦은 아이였다
“그래? 동생이 자꾸 괴롭혀?”
“예!”
“그럼 선생님이 혼내 줄까?”
기범이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두 팔을 크게 휘둘렀다.
“안 돼요. 안 돼요. 내 동생이 얼마나 예쁜데요!”ㅣ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그랬다. 그거였다.
기범이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동생을 예뻐하는 오빠였다. 나는 한 번도 기범이를 여동생의 오빠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한글을 모르는,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한글 교실 아이로만 생각했다.
기범이 뿐 아니다. 민희, 은희, 동찬, 지영, 보람, 성준, 민욱, 희진, 준현, 혁준, 준범, 바다, 창현, 준범, 영민, 경태, 모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글 교실 강사로 아이들을 만났고, 딱 그만큼 아이들을 알고 있었다.
글 몇 편을 쓰자마자 알아버렸다. 아이를 그 아이 그대로 쓴다는 건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글 교실에서 만났던 아이의 어떤 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냥 내가 만났던, 기억하는 모습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평소에 나는 아이들을 만나면 대게 행복한 편이다. 떠들고, 깔깔거리고, 기쁘고 즐겁다. 행복한 만큼 행복한 글을 쓰고 싶었다. 한글을 모르는 초등학생이라는 이유로, 아이들은 놀라움과 동정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싫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활기 넘치는지,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 알리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도 보통 아이예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글은 참 이상하다. 번번이 의도를 비껴가고, 다른 결론을 만든다. 아리고 힘든 이야기가 자꾸 환한 이야기를 앞질렀다. 어떤 날은 이야기 몇 편을 두고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면 나 조울증이라고 하겠네. 기뻤다, 우울했다, 이건 뭐지라고 혼자 그랬다.
극과 극이 부딪혔다. 어느 날은 이렇게 쓰면 안 된다고, 즐거운 이야기가 심각한 문제 상황을 은폐한다고, 속으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건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야, 대한민국 헌법 10조를 위반하는 문제라고. 우리 아이들은 학교 정규 수업 시간에 한글을 배울 권리가 있다고.
어떻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나는 아이들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걸까. 이야기를 쓸 자격이 되는 걸까,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중요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아이들은 내가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이들 이름을 가명으로 썼다 해도, 아주 심각한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이들과 보호자에게 동의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나는 답을 미룬 채 글을 쓰고 있다.
문제는 또 있다. 글을 통해 드러나는 나는 훌륭한 사람처럼 보인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사람. 과연 나는 그럴까? 자꾸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닐까?
온전하게 아이들 이야기를 쓴다면 이런 문제는 극복될 수 있을 텐데, 나는 아이들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난 그저 아이들의 어떤 부분을 공유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테다. 아니 해결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글을 쓰려는 이유는 역시 쓰고 싶다는 욕망,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한 가지만 더 욕심을 내본다면, “내가 쓰는 이야기는 사실이에요,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은 당신의 짐작보다 많아요.”라는 호소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닿아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누군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