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길이 아닌데도 똑바로 걸어갔다.
- 페터 한트케 <아이 이야기> 중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지역아동센터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는 ‘학습’이다. 여기저기서 ‘학습’, ‘학습’, ‘학습’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센터에 오는 아이라고 다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다. 반장도 있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도, 상을 받는 아이도 있다. ‘잘한다, 못한다.’의 기준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사칙연산과 한글 맞춤법을 지키지 못하는 아이가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센터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는 쪽이 더 많은 것 같다. 못하는 아이가 많아서일까, 센터는 온통 ‘학습’이라는 말이 둥둥 떠다닌다.
“학습해야지.” “학습 다 했니?” “학습 안 하면 안 돼.” “학습은?” “학습 다 한 뒤에 놀아.” “학습하기 싫어서 늦게 왔지?” “학습 너무 안 한다.”
아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못하는 아이만 듣는 게 아니다. 공부를 곧잘 하는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공부를 좀 하는 아이는 학습을 후딱 마친다. 수학 문제를 풀고, 국어 문제집을 다 하고 논다.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아이는 괴롭다. 센터에 늦게 도착해서 책상에 앉는다. 선생님이 범위를 팍 줄여주면 천만다행이다. 아이는 저녁 급식 시간까지 어떻게 하든 학습을 마쳐야 한다.
제일 힘들고 제일 문제인 아이는 공부를 아주 못하는 아이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그깟 다섯 문제 마음잡고 풀면 좋을 텐데, 한 문제 풀고 다른 아이 쳐다보고, 두 문제 풀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국어는 더 심각하다. 받아쓰기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한바탕 눈물 콧물 다 쏟는 아이가 있다. 점수가 낮은 게 속상해서가 아니라, 틀린 글자 쓰는 게 너무 싫어서다. 학습 공책을 숨기는 녀석이 있었다. 책꽂이 뒤에 숨기고, 다른 아이 책가방에 넣고, 며칠 숨기는 걸 계속하더니, 새 공책에다 공부할 때는 두 배로 하겠다는 말에 공책 숨기기는 포기했다. 빨간 색연필, 동그라미, 가위표, 점수, 지우개, 연필 자국, 너덜너덜한 문제집과 공책, 센터 책상 위를 쳐다보니 속이 갑갑하다. 속만 갑갑한 게 아니라, 머리도 지끈거린다.
오 학년인데 아직도 받아쓰기 4급을 맴도는 성범이가 그런다.
“도대체 왜 학습을 해야 하는데요?”
도대체 학습은, 공부는 왜 하는 걸까?
센터에서 몇 개월을 지낸 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직업을 갖기 위해서, 맞는 말이다. 근대 사회는 개인에게 일정 수준의 학습 능력을 요구했다. 읽고, 쓰고, 계산하는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이 패러다임은 유효한 걸까?
현대 사회의 유망 직종, 넉넉히 잡아도 인구의 10퍼센트만 차지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학습 능력을 갖추는 거로는 어림도 없다. 매우 창의적이거나, 매우 똑똑하거나, 매우 특별한,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부터 성장할 때까지 여러모로 남달라야 가능하다.
나머지 90퍼센트는 비슷한 거 아닐까? 그 안에 자잘한 등급이 있긴 하겠지만 거기서 거기까지 아닐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싫다. 비정규직, 가난과 궁핍, 사고사, 실명, 빚, 실업……. 그런 단어를 떠올리면 내 새끼와 내 새끼의 친구들과, 내가 만나는 절대다수의 아이들이 생각나서 힘들다.
공부를 해도, 하루 종일 학습을 해도 10퍼센트 안에 들기 힘든데, 90퍼센트 안에서 자리싸움을 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싶은데도, 도대체 우리는 왜 아이들에게,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걸까?
센터 선생님은 세상 돌아가는 걸 몰라서 아이들에게 학습을 강요하는 걸까, 아니다. 저임금과 고된 감정 노동,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여 있긴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다. 선생님들에게 왜 학습을 강조하는지 슬쩍 물어보았다. “최선을 다한다.”였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걸 알고, 학습을 좋아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아이들이 울고 가르치는 선생님을 원망하는 건 알지만 센터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를 시키는 거라고 말했다. 시키지 않으면, 잔소리하지 않으면 그나마 유지하는 학습 수준이 떨어지니까, 억지로라도 반복학습을 하면 더하기 빼기는 하니까, 받아쓰기 등급을 올릴 수 있으니까. 미안했다. 본인도 싫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 지루한 공방을 이어가는 그들의 진심에 ‘최선’이 자리 잡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센터에서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거리가 ‘학습’이라는 뜻이다. 학습 말고 뭐가 있을까? 학습이 아니라면 어떤 대안이 있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놀이, 자유, 창의적 문화예술교육, 인문학, 좋은 단어가 떠오른다. 이 훌륭한 배움을 가르칠 교사는 누구, 예산은 어떻게, 교사 교육은 어디서, 학부모가 학습을 원한다면, 문제는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결국 마음 맞는 공동체를 꾸려 센터를 운영하던지, 시스템을 고치던지 해야 한다는 어렵고 갑갑한 결론에 이른다.
현실도 문제도 대안도 비슷한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은 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자동차들, 서로 엎어지고 부딪히면서도 좁고 좁은 입구에 들어가겠다고 싸우는 자동차. 센터에 오는 우리 아이들, 가난하고 바쁜 부모를 둔 아이들, 성적이 바닥인, 앞으로도 1등은 못할 것 같은 아이들, 아무래도 고된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고 좁은 집에 살아갈 것 같은 아이들, 우리 아이들이 저기 맨 끝에 있는 낡고 낡은 자동차 같다. 아니고 싶고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개인의 거창한 결단과 사회구조적인 대안이 아니다. 현실적인,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조금 다른 현실이 필요하다. 아이들도, 나도, 선생님들도. 모두.
물론 공부를 해야 한다. 사칙연산과 쓰기, 읽기는 가능해야 한다.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도 공부는 필요하다. 공부는 사실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다. 우리가 인간이라서,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기에, 배우고 탐색하고 배우는 일은 세상과 나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하지만 이렇게 공부를 강요해서는, 성범이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도대체 왜 학습을 해야 하는데요?”
센터의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다른 말을 듣고 싶다. 누가 놀려서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툭툭 건드리는 아이를 잘 무시할 수 있는지, 달 모양 반지와 별 모양 반지 중 어느 반지가 더 예쁜지, 왜 중학생이 되면 머리 염색을 하면 안 되는지를, 태양의 후예 유중위가 왜 멋있는지, 신종 스마트폰을 가지는 것 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선생님이 되려면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선 화를 잘 참아야 한다는 걸, 오븐 없이 케이크 만드는 법을, 파티시에가 되어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어제 산 새 운동화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다.
그렇게 숨통을 튼다면, 속이 덜 갑갑해지고, 머리가 덜 아프다면, 책상 위 문제집과 공책이 편안하게 보인다면, 그렇다면 천천히 해결 방법도 대안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학습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 역시 차근차근히 답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