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은 나쁘다.

보람이, 성준이, 민욱이 이야기

by 열무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교실을 가득 채웠던 소리들은 어디로 흡수된 걸까? 내 뒤통수 뒤 아이들 모습이 궁금하다. “훅!”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린다 싶었는데, 이내 조용해진다.

나는 벽에 이마를 대고 천천히 ‘무궁화 꽃’을 외칠 준비를 한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이 조용한 교실은 우당탕 발자국 소리로 가득하겠지, 아이들 웃음소리도 들릴 거야.

앗, 그런데 내가 입을 열고 ‘무궁화’를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교실이 시끄러워진다.

“야, 강희원! 너 반칙이야. 선 넘었잖아.”

은희가 허리에 손을 얹고, 희원이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다. 희원이는 억울하다며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른다. 다른 아이들도 한 마디씩 거든다.

“깔깔마녀가 무궁화 말하기 전에 먼저 뛰어가는 게 어딨어?”

“짜증 나.”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다.

“애들아. 다시 하자. 자, 무궁화 규칙 첫 번째는 선 넘지 않기. 모두 다 잘 알지?”

아이들이 다시 출발선에 선다. 출발선을 넘는 아이는 아무도 없다. 만약 누군가 출발선 앞에서 무궁화를 시작한다면, 그건 반칙이다. 반칙은 나쁘다. 누군가 반칙을 하면 그 게임은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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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는 열세 살, 첫째 동생은 열 살, 막내 동생은 일곱 살. 엄마는 몹시 아팠다. 한쪽 얼굴이 돌아간다는 구안와사와 허리 디스크. 일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암이셨다. 엄마는 가을과 겨울 내내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들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누워있는 엄마 걱정보다 다른 일로 바빴으니까. 친구, 놀이, 학원, 사춘기, 축구, 낚시, 눈사람, 컬러 텔레비전, 야구, 책. 우리 삼 형제는 어렸고, 어렸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았다.

그때 막내 동생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바로 전 일곱 살이었다.


보람이 엄마

보람이는 웃으면 눈이 반달이 되는 작은 여자 아이다. 보람이는 글자를 읽고 쓰는 걸 힘들어한다. 다른 아이들이 받침 글자를 능숙하게 읽고 쓸 때, 보람이는 간단한 기본 글자만 겨우 읽을 줄 알았다.

보람이 엄마는 오랜 허리 디스크로 하루 종일 집 안에 있다. 선부동 밖을 나가 본 지가 8년이 넘었다. 안산 서쪽 끝과 동쪽 끝을 버스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삼십 분이다. 보람이 엄마가 만나는 사람은 이웃 집 언니와 전도를 목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다다. 보람이 엄마는 자기가 아파서, 자신이 못나서,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보람이가 한글도 못 읽는 바보 취급을 받는다며 자책을 했다.


동파

주영이 이모는 조선족 연변 자치구에서 태어났다. 1990년 유학을 간 뒤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다. 1987년 이모는 여섯 살 난 어린 아들 동파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처음 만난 동파는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는 아이였지만,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을 쓰기도 했다.

삼 년 뒤 이모 식구가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동파는 아홉 살이었다. 이미 한국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사용하던 동파는 세 번째 언어인 영어를 배워야 했다. 간간이 들리는 이모네 소식 중에는 동파가 언어 ‘트러블’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트러블’은 어떤 종류의 문제였을까? 한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트러블이다. 여전히 나는 동파가 겪었던 ‘트러블’을 알 수 없다. 자식 잃은 어미의 심장을 떠올려 본다. 나는 그 심장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일수록, 그 문제를 안고 사는 이는 그만큼 더 힘든 게 아닐까? 그래서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들의 문제에 닿으려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동파는 영어로 말을 하고, 책을 읽고, 문장을 쓰는 방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그때 이모와 이모부는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무척이나 고단했다. 이모와 이모부는 온전히 그들만의 힘으로 동파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을까?


성준이

성준이 담임선생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성준이 걱정을 한다. 수학 문제는 50개 중에서 48개를 맞는 아이가 ‘가’와 ‘고’를 겨우 읽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성준이 한글 선생님인 나 역시 할 말이 없다. 일주일에 한 번 성준이를 포함한 네 명의 아이들을 따로 가르치는 데도, 성준이는 언제나 뒤처진다. 그래도 나는 요즘 성준이가 글자에 부쩍 관심을 갖고 이것, 저것 물어보니까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 아이들을 만날 때 어떤 기준을 정해 놓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성준이는 머리가 나쁜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한글은 모른다. 만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성준이는 스케치북에 이 글자, 저 글자를 써 보라는 내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글자 몰라요.”라고 울먹이면서.

성준이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엄마와 아빠 모두 바쁘다. 이교대로 근무하는 공단 노동자의 삶은 성준이에게 한글로 책을 읽고 문장을 쓰는 방법을 알려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온 성준이 엄마는, 한국에서는 학교 가기 전에 글자를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 그때는 컬러 텔레비전도 없었고, 아침마다 두부 아저씨가 종을 치는 오래전이었다. 그러니까 1학년이 글자를 모르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 때였다. 자기 이름을 엉터리로 쓰고, 받아쓰기 점수가 50점 밑이라 해도 아이들은 하루 종일 바빴다. 나는 어릴 시절 겁쟁이에 울보였다. 하지만 내가 공부를 못한다고 걱정하거나 울었던 기억은 없다. 2학년 때였나? 받아쓰기 80점을 받고 엄마한테 자랑을 했다. 나는 결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날 붙잡고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엄마, 왜 그때 나한테 한글 안 가르쳐줬어. 애들이 이름도 못 쓴다며 놀렸잖아.”라고 했더니, 엄마가 마구 웃으며 그런다. “그래도 지금 너 글만 잘 쓰잖아. 그때 나는 글자 가르쳐 줄 생각은 안 했다. 니가 저절로 익히겠지, 아니면 학교에서 배우겠지 했다.”

그랬다. 그때는 수업이 다 끝난 후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선생님은 넓은 칸 공책에 가부터 하까지 글자를 써주시고 아이들에게 따라 쓰라고 하셨다.


민욱이

한글 선생님이 된 지 이 년째 되는 해였다. 주로 복지 대상 가정 아이들이 한글 교실에 왔는데, 엄마가 일을 하지도 않고, 급여 기준 역시 복지 대상자가 아닌 민욱이가 들어왔다. 이상했다. 가난한 것도 아니고 엄마가 집에 있는데, 아이가 한글을 모르는 게 낯설었고 틀림없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은 가혹하다. 나는 평소에 ‘한글 교육의 주체는 공교육’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일종의 신념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내가 막상 민욱이를 만나고 정반대로 생각을 한 거다. 민욱이 엄마는 왜 한글을 제대로 안 가르쳤지, 뭔가 문제가 있나 따위의 요상한 질문이나 하면서. 생각대로 생각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니.

민욱이가 학교에 들어오기 전, 민욱이 엄마는 기본 글자를 읽고 쓰는 것 정도로 충분하겠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학교는 민욱이가 아닌 대부분의 아이들 진도에 맞춰 수업을 진행했다. 민욱이 엄마는 마음이 급해졌다. 학습지, 학원, 엄마 공부까지 민욱이는 초등학교 입학 후 두 달 내내 한글 공부에 시달렸다. 그렇게라도 한글 공부가 잘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쉽지 않았다.

민욱이는 예민한 아이였다. 민욱이에게 한글 공부는 스트레스였고 공포였다. 처음 나와 받아쓰기를 했을 때가 기억난다. 글자를 불러주자, 민욱이 얼굴이 새파래졌다. 일 년 내내 나는 민욱이에게 “글자 못 써도 돼.”라고 말했고, 민욱이 엄마에게도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라고 이야기했다. 나의 위로는 진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진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니, 질문을 바꾼다. 나의 위로는 유효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열두 살이던 가을과 겨울,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었을 때 우리 엄마는 보람이 엄마처럼 허리 디스크를 앓았고 집 안에 누워있었다.

내 사촌 동파는 모국어가 두 가지였던 상태에서, 영어를 배워야 했다. 동파 엄마 주영이 이모는 성준이 엄마만큼 동파에게 영어를 가르칠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민욱이만큼 예민한 아이였다. 겁도 얼마나 많았던지, 어른들은 지금도 너처럼 별난 아이도 없었을 거라고 하신다. 나는 내 이름 ‘지은’을 ‘거은’이라 쓰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한다.




상상해본다.

막내 동생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칠판에 적힌 글자를 하나도 읽지 못해서 펑펑 운다. 엄마는 우는 동생을 달랠 생각은 못하고, 실의에 빠져서 무기력하게 자신을 탓하기만 한다. 그리고 막내는 받아쓰기 시험을 치면 30점도 못 받는 자기는 공부 같은데 소질이 없다며 의기소침해진다.

동파는 어떤가? 만약 미국 공교육에 타민족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없었다면, 주영이 이모는 동파를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와 일 중 적어도 한 가지는 포기하지 않았을까?

아니 나를 떠올려 본다. 글자를 읽으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리는 나, 수업 시간 내내 앞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나를 상상해 본다.

내 동생과 동파와 나는 보람이, 성준이, 민욱이와 다르다고? 뭐가 다르지? 내 동생과 동파와 나는 한글 교실 아이들보다 머리가 좋아서, 아니면 부모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우습다. 실소가 저절로 나온다. 결코 그런 말 같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내 동생과 동파와 나는 학교에서 글자를 차근차근 배울 기회가 있었고, 보람이와 성준이와 민욱이는 그 기회가 없었다.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서 글자를 배울 권리가 있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다 안다. 사교육 영역에서 선행 학습 특히 한글 교육을 금지시키자는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지, 공중부양 같은 이야기라는 걸 안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생각을 해야겠다. 출발선은 같아야 한다고, 적어도 모국어를 쓰고 읽는 것만이라도 같은 출발선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매일, 매일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대로 생각할 수도 없고, 결국 사는 데로 생각할 테니까.


다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생각한다. 무궁화 놀이가 재미있으려면, 무궁화 꽃이 활짝 필려면 반칙이 없어야 한다. 반칙은 나쁘다. 무조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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