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끝은 없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멀리 만년설을 뒤집어쓴 고산의 봉우리들이 두 눈에 들어왔다. 땀으로 범범히 된 몸으로 바라보는 설산의 모습은 환각에 가까웠다. 봉우리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의 형상으로 보였다.” -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중
이상한 도시였다. 호텔에서 밖으로 나가면 시끄러웠고, 먼지가 휘날렸다. 관광객을 부르는 가게는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원색의 옷감들, 나무로 만든 조잡한 장식물, 트레킹 용품, 환전소, 영어와 일어와 현지어 사이에 또렷하게 들리는 한국어. “들어오세요.” “물건 많아요.” “싸요.” 나는 이 도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이가 너무 좁아, 길과 길, 집과 길, 사람과 사람 사이가 좁아라고 투덜거렸다. 밤이 되자 온도가 갑자기 내려갔다. 호텔의 전기 사정은 좋지 않았다. 전기담요의 전원이 끊어지고, 나는 깨어나서 담요의 전원을 확인하고, 켜고, 끊어지고, 다시 켜고를 서너 번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 본격적인 트레킹을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밤새 설친 잠을 보충하려고 버스 안에서 잠들다 깨어났다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깨어났다의 한 순간이었다. 버스 창문 너머 흰 산이 보였다. 모퉁이를 막 돌던, 버스와 내 몸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설산, 환각, 꿈의 형상.
히말라야 트레킹에 참가했을 즈음,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난 갑작스러운 깨달음, 정확한 절망의 진술, 결단 등등을 좀처럼 믿을 수 없다. 가슴이 답답하고, 재미도 없고, 잠은 오지 않고, 몸 어딘가가 아프고, 그렇게 지지부진한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그때 내가 그랬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는 편이다. 그때도 그랬다. 몇 년간 나는 지쳤고, 지루했고, 힘들었다.
소설을 먼저 읽었고, 설산을 걸어가는 일이 다음이었다. 둘 사이의 상관관계는 거의 없었다. 소설은 소설, 트레킹은 트레킹. 열흘을 보내고, 집에 도착한 뒤에 소설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설산을 누군가 완벽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데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안도감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외롭지 않다는, 외로울 필요 없다는.
“그는 자신의 슬픔을 납득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자신은 살아남았으므로 또 뭔가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면서도 위로했다.” - 같은 책
그의 여자 친구는 한강으로 투신했다. ‘용서해주십시오’와 ‘없었습니다.’로 끝나는 두 문장과 “후회는 없어.”라는 한 문장, 그러니까 총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유서를 남기고. 그는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유서의 어디에도 자신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하다고만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여자 친구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처음이었다.
학교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기, 소설을 쓰기. 그는 이해하고 싶었다. 여자 친구는 왜 자신에게 죽음의 어떤 낌새도 보여주지 않았을까, 왜 여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왜 여자 친구는 죽었을까. 아주 긴 시간. 그는 긴 시간을 통과하고 설산으로 향했다. 알 수 없는 문자, 군데군데 비어 있는 문장으로 번역할 수 없는 <왕오천축국전>을 들고.
납득하지 못하고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나라는 사람은 합당한 거리를 찾는다. 어떤 지점을 찾고, 그 지점에서 납득과 동의와 받아들일 내용을 정리한다. 처세술이라면 처세술, 삶의 태도라면 삶의 태도일 수 있는. 하지만 가끔 그 합당한 거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일이 있고 대상이 있고 세계가 있다. <설산~>의 그를 읽기 시작했을 때도, 찾지 못하는 어떤 게 있었다. 히말라야로 행했던 그때도 역시. 소설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어느 날은 왕오천축국전의 얄궂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고, 어느 날은 눈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는 대원들의 행적이, 그가 첫 소설을 들고 술에 취한 장면에 머물렀다.
책을 읽고, 설산에 오른 후 십여 년이 지났다. 설산 속의 그는 낭가 파르트에서 실종되었고, 요즘의 나는, 지금까지 언제보다 명료하게 살고 있다. 아이들에 둘러싸인 생활은 눈과 귀를 예민하게 만들고 다리와 허리를 아프게 하지만, 감정과 생각은 투명해져서, 허락한다면 이렇게 계속 사는 것도 괜찮겠구나 한다. 나는 작은 개구리의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마귀의 긴 다리가 우아하게 뻗는 순간을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중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살아남았으므로 또 뭔가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체현하는 셈이다.
한 사람의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여러 느낌과 여러 생각과 여러 기억과 또 차마 알 수 없는 무의식 한 가득을 안고 있다. 다행이라면 다행. 이제 나는 현재의 느낌과 생각과 기억과 무의식이 오롯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내 것’을 한 사람의 죽음에 던져놓지 않아도 되다니. 십여 년 전 소설을 읽었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저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모든 꿈들의 케른,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는 수정의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이 끝나는 세계의 끝.”
그리고 끝은 없다.
덧글 : 이야기 속 누군가를 쓴다면 반드시 써야 할 사람이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리고 생각했다. 지난주부터 글을 써야지 했다. 일주일 동안 여러 죽음이 내게 차가왔다. 뜨락이 죽음에 관한 글을 올렸고, 선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 분은 남민전 조직원이었고 오랜 세월 감옥에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전 5년을 그 분은 현실이 아닌 오래 전의 감옥에서 살아가셨다. 평균 수명을 사년이나 넘긴 어항 속 물고기가 죽었다. 이제어항속에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만 남았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두통을 선사했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사실일 뿐이다. 하지만 죽음과 관련한 여러 상념은 또 나의 몫이다. 우울하고 슬프고 화나고 안타깝다는 단어로 정리할 필요 없는 내 몫이다. 덕분에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 관한 글이 다르게 쓰여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