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에 대한 고찰
어디에 사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그건 아마도 직업을 자주 옮겼기 때문일테고 어쩌면 말투 한 켠에 여전히 남아있는 조금의 억양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림이라는 이젠 조금 입가에 익은 동네의 이름을 발음할 때면 사람들의 반응은 이내 비슷하다. 사람들의 뇌리 한켠에 남아있는 그 어떤 반응에서 신림은 여전히 가난하고 추운 동네라는 인상이 담겨있기도하고 고시촌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왜 거기에 사냐는 질문으로 어색함을 종종 덮으려 하기도 하지만 이 동네는 여전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품어주는 서울 생활의 첫 번지수와 같은 곳이다. 따뜻한 고향을 억지로 떠나와 눈 뜨고도 코 베어간다는 서울에 살아가며 몸도 마음도 추울 때가 많았지만 나처럼 신림 한켠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동정심이나 삶에 대한 끈기같은 것들 되려 더 느끼곤 했다. 짧지 않은 2년의 관악구 살이 끝에 비로소 이사를 결정하며 이 곳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 풀어보려 한다.
신림이라는 동네에 살기 바로 전에는 한 정거장 거리의 신대방역에서 서울의 첫 시작을 했다. 신대방역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좋은 이유는 아마도 그 곳이 지하철에서 지상철이 되는 구간이기 때문이기도, 지하철을 사이에 두고 관악구와 영등포구로 나뉘는 신기한 구역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지만 가장 좋은 것은 계절이 지나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노상 포장마차에서 들이키는 소주 한잔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 곳에는 나름의 인심이 있었다. 우동 한 그릇과 닭꼬치 1인분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시키면 만원을 조금 웃도는 돈이 나오는데 주머니에 현금이 없는 날이면 우리는 으레 주인장과 단골의식을 치르며 계좌번호 송금으로 값을 치르곤 했다. 위생적이라 말할 수도, 화장실을 위해 조금 다리를 움직여야하는 불편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서울에 혹은 동네에 누군가가 놀러올 때면 언제나 하나의 의식처럼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 곳에 앉아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리고 또 옆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무게를 듣다보면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서러운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외로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외로움을 술 한잔에 잊어보기도 또 홀로 우동 한그릇과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뉴스와 소주잔을 번갈아 시선을 옮기는 누군가의 아버지를 보며 삶의 무게를 조심스레 짐작해보기도 했다. 출근은 언제나 숨막히는 강남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혼자인 시간이면 합정이나 홍대입구역을 목적지 삼아 지하철을 타고 지상을 달리는 지하철의 창 밖을 언제까지고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 곳에서 바라보는 계절의 변화는 무척이나 선명해 회색빛 땅과 발끝만 바라보던 내가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1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는 조금 더 넓고 쾌적한 공간을 위해 이사를 결정했다.
두번째 집은 조금 더 깨끗했지만 신림역과 조금 더 가까워진 장소였다. 아마 내가 이 동네를 쉬이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이미 보금자리를 만든 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부담스러운 집값을 선뜻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렵사리 얻은 주머니의 푼돈을 보증금으로 털어넣으면 월급이 들어올 때까지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은 시장 안 오래된 칼국수집이었다. 5,000원도 안되는 칼국수 한 그릇이 주는 포만감을 아마, 시간이 지나 첫 서울을 떠올릴 때면 언제까지고 기억하게 될거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때론 어려운 삶을 선택한 내 자신에 대한 서러움의 눈물을 삼키며 면발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넣었고, 때론 누군가와 함께 허기를 채우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감정의 허기가 어떠했든 그 칼국수 집은 언제나 한결같은 포만감으로 감정을 채워주었다. 이따금 집으로 향하는 길에 고추장이 눌러붙은 떡볶이를 사다 먹는 일도 하나의 패턴이 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만큼은 감정의 허기를 채우진 못했다. 허기야 어찌 되었든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도림천을 따라 걸음을 옮기거나 자전거를 빌려타는 일은 신림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내가 비가 내리지 않는 날들을 좋아한 건 도림천을 따라 걷는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집을 옮기는 동안 몇 번이나 직장이 바뀌었다. 그것은 때론 자의적인 선택이었고 또 타의적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이 어떠했든 집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향하는 길이 언제나 쉽지만은 않았다는 기억은 여전하다. 사람들로 가득찬 버스를 비집고 타는 일이나 버스에 내려 길 한켠에 아무렇게나 잠들어있는 누군가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옮기는 일, 누군가가 분주하게 게워낸 것들과 그 곁을 둘러싼 비둘기를 피하는 일 그리고 그 곁으로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쓰레기더미를 비집고 발걸음을 옮기는 일은 아침부터 진이 빠지는 무엇 이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출근하는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하며 나는 서울에 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한국에 돌아와 가장 큰 충격을 느꼈던 지하철 풍경을 2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나는 온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제일 선명하고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술에 조금 취한 동생이 아픈 나를 위해 집 주변 몇 곳의 편의점을 돌아 정작 나에겐 필요없는 약들을 사다준 일. 아마 동생은 추운 도시에서 꾸역꾸역 지내다 병이 나버린 내 모습이 슬펐는지도 모른다. 처방전없이 살 수 있는 아무런 약을 사다가 그렇게라도 나를 위로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만다. 이 춥고도 어려운 도시에 동생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오는 일이다. 아마 동생은 매일 같이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서울에 오겠다는 생각을 마음 한 켠에 접어둔 듯 했다. 나라는 표본을 통해 해외에 나가는 것도 또 서울에 오는 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동생에게 나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지 않지만 치열한 서울의 삶을 경험하며 나는 마침내 2년 간의 신림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해가 잘 드는 집이 있는 곳으로, 다른 도시로 향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곳으로, 출근 길이 춥지 않은 장소로 말이다. 삶을 더 단단하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이제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술에 취한 이들보다 계절이 변하는 풍경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동네에서 다시 새로운 걸음을 시작하지만 강렬하고도 치열했던 신림의 풍경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앞으로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믿으며 나는 조금씩 떠남을 준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