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떠나기 전 해야 할 일들

로드트립을 떠나기 전 해오던 일들에 대하여

by Jessie
IMG_5256.jpg 백패커의 아침 9시 40분

퍼스에 머무르는 며칠 동안 하우스키핑을 제안받았다. 생각보다 머물러야 하는 날이 길어지기도 했고 무료했던 찰나였으니 나로서는 몇 시간의 아르바이트로 3일 치 숙박비를 대신하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베개 커버와 침대 커버 그리고 이불 커버를 빠르게 정리하고 방의 환기를 시키는 일이 하우스 키핑의 몫이다. 백패커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게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내가 머물던 백패커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젖먹이 아기부터 하얀 수염이 길게 난 80세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머물렀다. 한 때 뜨겁게 타올랐던 철광석 단지와 금광 채굴 그리고 먼바다에서 작업되는 천연가스 추출 건들 이 사그라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고 언제든 다시 전화만 받으면 돌아갈 수 있도록 백패커에 머물며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였다. 이처럼 짧게는 하루부터 많게는 몇 달의 장기 투숙객에 이르기까지 백패커에는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으니 나는 백패커를 여행자 라이브러리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혼자 앉아 있노라면 잠시도 심심할 틈 없이 누군가가 인사를 건넸고 또 대화가 시작되었다. 조금 다른 피부의 여행자에 대한 호의가 나쁘지 않았다.








IMG_5154.jpg 노스브릿지 교차로

일을 하지 않은 날에는 좋아하는 카페에서 바깥 풍경을 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한 순간의 감정도 잊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타자를 두드리는 일이 지겨워지면 교도소로 향할 편지를 조심스레 써 내려갔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호주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모멘텀이 되어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낯선 언어로 둘러 쌓인 공간에서 한국어로 쓰인 책이 그리워진 누군가를 위해 책 속의 글귀를 조심스레 옮겨 적는 일 그리고 그 구절이 내 삶에 서서히 녹아드는 기쁨을 느끼는 일. 사실 오롯이 나의 시간과 노력을 그에게 쏟아붓는 일방적인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은 나의 자존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IMG_5257.jpg 퍼스의 늦은 가을


일주일에 한 번 그를 만나러 가는 일은 꽤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교도소 면회를 위해서는 미리 가능한 날짜, 가능한 시간을 전화로 예약해야 했고 그가 마지막으로 걸어 나와야만 면회가 가능했다. 시내에서 트레인을 타고 내려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교도소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는 40분 혹은 1시간 꼴로 운행되는데 면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소지품을 모두 맡기고 들어갈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교도소 입장을 위해서는 금속 탐지기를 한번, 몸수색을 다시 한번 거쳐야만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가 없는 쥐색의 옷을 입고 걸어 나오는 그를 멀리서 바라볼 때면 나는 오늘도 한 시간 동안 웃음을 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먼 길을 온 나에게 초콜릿 과자를 내밀며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라고 반갑고도 다정한 존댓말을 건네는 그는 한결같이 바르고 좋은 사람이었다. '잘 알지 못해서' 했던 행동들이 결국 '엄청난 일'이 되어 버린 경험을 했던 적이 있기에 나는 그를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슬펐으며 마음을 다해 그를 대했다. 그래서 우린 좋은 친구임에 분명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삶에 찌들어 그를 차차 잊어가는 동안 아마도 그는 그곳의 삶에 익숙해지기 위해 나보다 더한 노력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곳을 떠나고 벌써 두 번이나 교도소가 바뀌었다고 했다. 잊고 지내온 시간들에 양해를 구하며 익숙한 이름을 편지지 위에 채워 넣었다. 이 편지는 내가 떠나기 전, 울룰루에서 혹은 케언즈에서 비로소 그에게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가 한국에 돌아오면 내가 가장 좋아하던 협재 바닷가에 가서 아무 말 없이 오래오래 읽고 싶은 책을 읽다 오자는 이야기가 아마 편지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IMG_7420.JPG 로드트립을 함께 해준 로드 88


편지 쓰기가 끝나면 마침내 짐을 꾸리게 된다. 짐을 꾸리기 전 필요한 물건의 목록을 짜임새 있게 써 내려갔다.

텐트와 요가 매트, 냉장고와 전등, 제리 캔(연료를 넣을 수 있는), 벌레퇴치 스프레이, 지도책, 수건과 침낭, 물과 인스턴트식품, 세면도구와 화장품, 일회용 사진기와 카메라 같은 것들 말이다. 나름 단출한 여행이지만 짐은 단출하지 못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나 길 위에서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시는 일은 축복과도 같은 일이기에 보온병은 필수품과도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두 어깨에 질 정도의 무게면 충분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지만 인간은 금세 잊어버리는 동물이기도 하다) 얼추 짐을 꾸리고 연료를 가득 채운 후 먼 길을 떠난다. 대부분의 여정은 동이 트면서 시작되는데 오렌지 색의 하늘을 뒤로하고 떠나는 길은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다. 민간인 라이프를 한동안 등한시한 채 지내게 된다고 생각하면 2불의 편의점 커피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정말 오랜만에 여행자가 되어 사막으로 향하고 있다. 믿기지 않는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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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계정 @fightingsz

그림일기 @jessie_evenfolio




아직 철들지 않은 30대. 걷고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들은 모두 따뜻한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여전히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


미국 디즈니월드 Ⅴ

서호주 로드트립 124,700km Ⅴ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 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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