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입문기
ESFJ 사교적인 활동가
어렸을 때부터 MBTI 검사 결과지를 받으면 나는 언제나 같은 유형의 사람으로 정의되곤 했다. 심리검사나 성격유형을 알아보는 활동들에 자주 참여하곤 했으니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도가 남들보다는 조금 더 생긴 것 같기도 하다. 큰 변화없이 같은 유형의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나에게 좋은 뜻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역시 너답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너답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이야기하던 '나다움'은 바로 새로운 일에 겁내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현실에서 제자리걸음인 이유는 꾸준함의 부재 때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자주 도전하긴 했지만 세상의 빛을 받지 못하는 일들에는 금새 흥미를 잃었다. 끈기를 가지고 오래 해오고 있는 일이라면 글쓰기 하나 뿐이었으니 나는 늘 꾸준함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남편에게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은 바로 내가 가지지 못한 차분함과 꾸준함을 그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싱장의 문을 처음 열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주중주말 할 것 없이 바빠 얼굴조차 보기 힘든 남편에게 나는 잔뜩 심술이 난 상태였다. 남편에게 섭섭함을 토로해보아야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그 시간들을 이용해 그간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일들에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거니와 다른 이유로는 서른이 넘도록 자주 방황하는 스스로에게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 모임에 나가고, 그림을 그리고, 메이크업을 배우거나 책을 만드는 정적인 활동도 있었지만 기구 필라테스, 러닝 클럽, 복싱과 같이 땀을 흘리고 평소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이는 활동들도 꽤나 있었다. 나는 서울에 사는동안 조금 더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노력, 비겁하게 나의 선택에서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는 용기를 가질 수만 있다면 내 앞에 놓여진 오늘이 과거의 것들보다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일을 시작해보기로 했고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크게 부담되지 않는 비용으로 도전할 수 있는 복싱이었다. 원데이 클래스로 딱 한번 경험했던 복싱은 단 두시간의 수업이었지만 꽤 강렬한 기억임에는 확실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섰던 복싱장 출구에는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는데 나는 그 당연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문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원데이 클래스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작은 모퉁이 카페에서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쌉싸름함이라던지 땀을 흘린 후 느꼈던 개운함은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오르던 그 글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반년의 시간이 지난 뒤 내 발길을 복싱장으로 이끌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알려주지 않은 그 '평범한 노력'이 무엇인지 나는 답을 알고 싶었다. 언제나 평범한 노력에서 끝이 나고 마는 나의 모든 시도들이 한 번쯤은 특별한 노력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의외로 예상치 못한 것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였기에 나는 요가와 필라테스 그리고 달리기를 거쳐 복싱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러한 내 결정에는 남편이 함께 동참하기로 했다. 이유인즉슨, 집에 돌아오면 방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 잠들어버리는 저질 체력의 그와의 계속되는 다툼을 줄여보기 위함이었다. 몸을 움직여야 살아있는 기분이 드는 나와 잠시라도 더 쉬고 싶어 하는 그의 체력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기에 우리는 함께 운동을 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함께 저녁을 보내고 같은 공간에서 땀 흘리는 그 시간들은 그와 함께한 이래로 나에게는 가장 기쁜 시간이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노력을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의미 없는 약속들을 줄이는 일 그리고 삶에서 마주하기 쉬운 핑계들을 이겨내고 ‘해야만 하는 것’을 지키는 노력이었다. ‘추워서’, ‘회사 회식 때문에’ 혹은 ‘오늘은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같은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듯 들리는 이유들 앞에서 스스로가 떳떳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복싱을 시작하고 내가 마주하게 된 가장 처음의 과제였다. 시작은 언제나 작지만 꾸준함은
그 시작을 의미있는 곳으로 이끌어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매일 복싱장에 가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곤 했다. 나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노력으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다 / 모하메드 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