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복싱_ 2 스트레칭
복싱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스트레칭이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울 앞에 서서 적나라한 내 몸뚱이와 마주하는 일은 꽤나 생소하고 또 당황스러운 광경이었지만 그런 나의 감정을 다 이해하는 듯한 관장님은 내 몸을 채 관찰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 어깨 넓이만큼 다리를 벌리고 일자로 서서 스트레칭부터 시작하자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함께 해드리지만 사실 스트레칭은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방식이 없으니 충분히 몸을 풀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맞게 하시면 돼요”
스트레칭의 순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으로 흘렀다. 눈을 뜨고 하루를 바쁘게 보낸 후 저녁 8시가 되면 그제야 비로소 목덜미의 근육들이 얼마나 긴장감에 굳어 있었는지를 느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창의적인 것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목을 쭉 빼고 하얀 화면 속 커서만 바라보다 보니 목의 근육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뻐근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 목덜미는 이따금 화가 날 때면 두둑두둑하고 소리를 내곤 했는데 하루종일 혹사 당한 목이 내는 아우성처럼 들리곤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는 요가를 하면서 배운 동작들을 이용해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내공이 조금씩 쌓였다. 목 스트레칭이 끝나면 목선 바로 아래 자리한 어깨를 풀어주는 시간.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던 몸을 하얀 사무실에 가둬둔 채 9시간을 점잖게 보내느라 굳어버린 근육들을 달래주는 시간이다.
다음은 양 팔을 풀어 줄 차례.
어깨 너비만큼 다리를 벌리고 서서 호흡을 내쉰 후 한쪽 팔을 반대쪽으로 당기면서 팔 바깥 근육을 늘려준다. 팔은 복싱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부위 중 하나이기에 팔과 팔목은 충분히 풀어주어야 하는데 이는 몇 번의 고통을 통해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일하는 동안에도 쉴 틈없이 움직이던 팔과 손목은 복싱을 할 때는 그 전보다 몇 배는 더 호되게 움직여야 했으니 그에 대한 예우를 충분히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팔과 손목을 풀어주고 나면 팔만큼이나 중요한 다리를 풀어줄 차례이다. 하루 종일 걷고 서있느라 퉁퉁 부어있는 다리에게는 특히나 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더욱이 쉴 틈도 주지 않는 주인을 만난 덕분에 녀석들은 어린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매끄러운 모습인 적이 없었다. 복싱을 하면서 더 세밀하게 자리잡게 된 근육들을 보니 앞으로 백발의 할머니가 될 때까지는 아무래도 매끈한 일자 다리가 될 수 없겠다며 이미 포기하고 있는 요즘이다. 어쨌든, 다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또 빈틈을 노려 허를 찌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조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줄 필요가 있다. 지난해 마라톤을 하면서 난생처음 정형외과 신세를 졌던 나였기에 다리와 발목의 스트레칭에는 좀 더 시간을 들이고 있다.
복싱장으로 향하는 일은 나에게는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과도 같다. 하루 동안 회색 벽에 갇혀 생기를 잃어버린 몸과 마음이 마음껏 활동하는 시간이자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내 몸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과정이랄까. 평소에 쓰지 않던 혹은 하루 종일 주인도 모르게 혹사당했던 근육들이 섭섭하지 않게 들여다보는 시간이라 표현하는 것이 조금 더 어울릴 것 같다. 가장 날 것의 내 몸과 만나는 이 오묘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들 이를테면 내가 원하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 줄 다리,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 두 눈,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소중할 오늘, 세상의 끝에서도 나를 믿어줄 가족 또 내 것은 아니지만 온전히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이 나에게 주는 온기가 얼마나 큰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