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소울 푸드 '통닭'
누구에게나 특정한 장면이나 사람을 보면 떠오르는 음식이 있듯 나에게도 매 달 월급날이 되면 불현듯 생각이 나는 음식이 있다. 자취와 서울 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꽤 자주 먹는 음식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급날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다 보면 언제나 나는 유년 시절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내복을 입고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앉아있는 장면으로 돌아가고 만다.
시장을 지나다 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통닭'이라는 단어. 나는 그 평범하고도 투박한 이름의 음식을 그 무엇보다 좋아했다. (어렸을 적 최애 음식 1순위가 메뚜기 튀김이었고 2순위가 통닭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엄마의 월급날에야 어렵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뭔가 특별한 날인 듯 가족들이 둘러앉아 등을 동그랗게 만들어 닭 한 마리를 뜯고 있는 모습이 그리 따뜻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집이나 그러했듯 아빠 혼자 벌어오는 돈으로는 우리 남매의 학업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동생이 5살 무렵부터 엄마는 농공단지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동생과 내가 모두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등교를 하고 나면 엄마는 그제야 부랴부랴 아침상을 치우고 출근을 했다. 그 시절, 엄마의 속도 모르고 뛰어노는 일이 더 즐거웠던 나는 동생을 돌보는 일이 뒷전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무렵, 집으로 돌아갔을 때 퇴근 후 돌아온 엄마는 현관을 등지고 앉아 급하게 눈가를 닦고 있었고 아빠와 엄마가 언성이 높아지는 상황 속에서야 어린 동생이 열쇠로 문을 열지 못해 복도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흘려들은 기억이 있다.
결혼을 하고서야 이 장면을 몇 번이고 꺼내보는 것은 나 역시도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으레 겪게 될 문제이기도, 주변의 친구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속상한 상황들을 몇 번이고 겪으면서도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엄마는 몇 번이고 눈물을 닦으며 회사를 다녔다. 그 사이 엄마가 속해있던 회사는 몇 번이고 바뀌었지만 엄마는 한 번도 아픔이나 게으름과 타협하지 않은 채 우리를 어른으로 키워냈다. 엄마가 부리던 사치라곤 오일장에 줄지어 있던 이름도 모를 브랜드의 바지와 티셔츠였고 나도 그런 엄마를 따라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옷들을 애써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고 자랐을 뿐이었다.
삶에 치이며 살아가는 와중에도 적어도 한 달에 한번, 엄마의 월급날이 되면 엄마는 동네의 통닭집에 전화를 걸어 치킨 한 마리를 주문하곤 했다. 으레 있는 일이라 나와 남동생은 월급날 언저리가 되면 찬장 위에 올려진 치킨집의 쿠폰을 세어 보면서 몇 번을 더 먹어야 무료로 통닭을 먹을 수 있는지를 떠올리며 설레어하곤 했다. 언제나 다리는 동생과 내 접시에 제일 먼저 담기던 모습은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네 식구가 둘러앉아도 언제나 한 마리의 통닭을 다 끝내본 기억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며 모아주신 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다. (29살의 남동생은 백수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제 입에 풀칠하며 사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아느냐고 묻던 엄마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몇 번이고 밀려오는 퇴사 욕구 때문이었고 또 퇴사를 결심한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월급날이면 노릇노릇하게 튀겨져 온 통닭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가 먹던 그 음식에는 후라이드 치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이었겠지만 그 시절의 소소한 행복을 떠올리기에는 통닭만큼 친숙하고 또 따뜻한 단어가 없기에 나는 오늘도 엄마에게 또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묻는다. "여보, 우리 오늘 통닭먹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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