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없는 결혼과 혹독한 시집살이

고단한 할머니의 시집살이와 오일장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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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



신랑 얼굴도 모르고 시집을 왔다는 할머니 이야기를 대여섯 번쯤 들었을 무렵 나는 결혼을 했다. 서로를 알지 못한 채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꽤 허무맹랑하게 들린다며 웃고 넘기던 나였는데 얼마 전 아랫목에 나무를 잔뜩 넣어두고 온돌방에 앉아 할머니와 나누던 이야기는 꽤나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한 편의 긴 서사였다.



할머니는 2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다섯 식구가 먹고 살만큼의 논과 밭이 있던 할머니 가족에 어려움이 찾아온 것은 아버지가 결핵으로 돌아가시면서부터였다. 그 시절만 해도 결핵이라는 병은 고치기 쉽지 않은 병이었고 할머니가 사는 동네는 오늘도 읍내까지 버스로 20분은 나가야 하는 곳이니 병원에 갈 생각조차 못하셨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이모가 세 남매와 함께 모든 재산을 받아가셨다. 그리고 온갖 구박이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빨래, 냇가에서 물 길어오기와 같은 집안일을 비롯해 밭과 논 일까지 중, 고등학교도 제대로 보내지 않고 일을 시켰던 이모 가족 밑에서 지내며 할머니는 매일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꿈을 꾸셨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18세가 되던 해, 먹고사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이모와 이모부는 할머니 삼 남매의 출가를 서둘렀다. 이모부가 알음알음받아 온 시집 자리는 바로 아랫마을 붉은덕의 장손 집이었다. 마을 이름이 붉은덕이 된 것은 동네의 흙들이 황토 성분이 강해 다른 곳보다 질고 붉은빛을 띠고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팔려가듯 떠나간 붉은덕에서의 삶은 그곳의 붉은 흙처럼 할머니 삶 구석구석에 물들어 쉽게 지지 않았다.






초가집에서 파란 기와집 주인이 되기까지




방 두 칸의 작은 초가집에서의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다. 7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살아가기에는 무척이나 비좁고 가난한 집이었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3남 2녀를 키운 증조할머니는 누구보다 호되게 할머니를 시집 살이 시켰다. 거기다 두 시누이는 일손 하나 도와주지 않고 사사건건 입을 대고 쉴틈을 주지 않았으니 할머니가 여든이 넘도록 신경정신과 약을 달고 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장손이었던 할아버지 역시 철이 없었고 할머니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것이었는데 의지할 곳 없이 시집살이를 하면서 할머니는 고추를 따다가도 울고, 배추를 심다가도 울고, 이웃에 소를 빌려 올 때도 울었다. 소 한 마리 없이 살아가는 삶이 서러워 할머니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밭에서 난 것들을 20리를 걸어 나가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장에 다녀오면 밥 안 차리고 뭐하냐는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아이는 방 한편에 누워 젖을 달라고 하염없이 울었다. 첫 애를 낳고 도망갈 요량으로 보자기를 쌌지만 몇 리 가지 못해 다시 돌아오고 둘째를 낳고 또 도망갔다 울며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보니 할머니는 어느새 3남 1녀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장남이었던 아빠를 장가보낸다며 할머니가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온 날, 증조할머니는 장애가 있는 본인의 막내아들보다 할머니의 아들이 먼저 장가를 간다는 이유로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할머니의 뺨을 때리기도 한 지독한 시어머니였다.


눈칫밥과 눈물을 거름 삼아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밭을 갈고 또 거기서 난 작물들을 내다 팔며 모진 시누이들을 모두 시집보내고 몇십 년 후에는 초가집에서 비로소 기와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가난을 벗어나기까지는 강산이 몇 번이고 흘렀고 할머니가 신던 고무신은 셀 수 없을 만큼 닳았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파란 기와집에서부터였다. 혼자서는 결코 갈 수 없었던 오래된 재래식 화장실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던 몇 마리의 소가 있던 움막, 마당에서 쉼 없이 자라던 누렁이들 그리고 온돌방에 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던 증조할머니까지 말이다.






할머니의 청춘이 담긴 오일장




한 번은 오일장에 물건을 내다 파시는 할머니를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에 택시를 불러 타고 시장에 간 적이 있다. 할머니는 오일장이 되면 떡집 귀퉁이에 앉아 쑥, 냉이 같은 재철 작물들과 미역줄기, 멸치 같은 것들을 파시곤 했다. 동이 채 트기도 전인데 시장 어귀는 늘 목도리를 아무렇게나 두른 할머니들로 북적였다. 할머니는 보자기를 이고 진 채로 능숙하게 자리를 폈고 시장 상인들이 피워놓은 드럼통 모닥불에 나를 밀어 넣으며 추위를 녹이게 하셨다.


한 봉지 이천 원, 삼천 원 하는 것들을 오후 느지막이 까지 팔고 나면 할머니는 그제야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따금 엄마와 시장에 들러 할머니께 갈 때면 할머니는 늘 주변에서 받은 도넛이라던지 바나나를 나에게 건네 주시곤 했다. 철없던 그 시절에는 그것이 할머니의 요기인 줄도 모르고 넙죽 받아먹으며 할머니의 복주머니에서 용돈을 받아 핫도그를 사 먹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할머니와 오일장에 나가 손 끝까지 시린 겨울을 몇 번이고 겪으면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제일 처음 받은 월급으로 시장통 속옷가게에서 할머니 장갑과 내복을 사드렸다. 조금 슬펐던 건 어린 시절부터 궂은일을 쉼 없이하며 마디마다 고통이 남은 할머니 손에는 내가 드린 아이보리색 장갑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쉼 없이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장난감 삼아 놀던 겨울날, 할머니와 함께 시장 어귀에서 먹은 퉁퉁한 면발의 칼국수라던지 할머니의 허리춤에서 나오던 자주색 돈 주머니의 빛바랜 화려함이 나는 늘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가 나에게 건네주던 건 동이 트던 오일장의 푸르스름한 추위를 견디며 차곡차곡 쌓아오신 마음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아주 오랜 지금에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더 많이 배우고 씩씩한 사람이 되길 바라던 할머니의 바람처럼 나는 자랐고 또 그렇게 엄마가 되어간다. 빛바랜 서러움을 짊어진 할머니의 굽은 뒷모습 위로 자유로웠던 내 삶이 선명한 비행운을 띄우며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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