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엄마'말고 그때의 내가 되고 싶었던 것들

by Je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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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34년의 인생에서 '엄마'라는 역할 하나가 더 해졌을 뿐인데 이 두 글자가 주는 무게가 꽤 무겁고 단단해서 그동안 내가 해오던 모든 것들에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고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8월 11일에 세상에 나오기로 했던 2.4킬로의 아기는 태명처럼 8월 첫째 날 샛별이 뜨는 시간을 앞두고 태어났다. 출산의 고통은 지금까지 으레 들어왔던 (혹은 상상해왔던) 고통과 차원이 다른 무엇이어서 나는 꽤 오랜만에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간 내가 도전한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정을 넘기자 진통은 점차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고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아기 심박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실컷 진통으로 고생을 하고 결국 제왕절개를 하는 결론을 마주해야 했기에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아기를 밀어냈다. 그렇게 3시간의 사투 끝에 샛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초산의 평균 시간이 11시간 정도임을 생각하면 비교적 빨리 아이를 낳은 셈이었다.


조금 생뚱맞긴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서 떠올린 것은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봤던 송아지 낳는 장면이었다. 입김이 나오는 추운 겨울 새벽녘, 할머니와 할아버지, 송아지 받는 아저씨 그리고 어린 나까지 모두가 막사 한편에서 지켜보던 출산의 과정은 생경했지만 꽤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눈이 커다란 어미소가 몇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울음을 울며 낳은 송아지는 양수에 잔뜩 젖어 짚으로 덮인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할머니는 모성애가 없는 어미소를 대신해 수건으로 송아지의 온몸을 정성껏 닦으며 엉덩이를 몇 번이고 때리셨다. 태어나자마자 걷지 못하면 앉은뱅이가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나는 송아지가 태어나자마자 걷는 신기한 장면을 어린 기억 한편에 담아두었고 그것은 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 가까스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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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넉넉해 본 적이 없었다. 대신 내 주머니에는 치기 어린 용기가 가득 들어 있어서 5년의 시간 동안 그리 크지도 않은 배낭을 메고 겁도 없이 세상을 돌아다녔다. 기차를 타고 강원도와 전라도로 훌쩍 떠나기도 했고,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가 하면 미국의 디즈니월드에서 인턴생활을 하기도 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돌아오기도 했고 호주의 사막을 횡단하고 우주생물학 탐사 전문가로 오지를 누비기도 했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혼자 떠나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린 시절이었다.


방랑으로 시작된 걸음이었지만 부모님의 시선에 비치는 나는 방황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이었던 모양이었다. 남들처럼 살아주길 바라던 아빠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국 캐리어를 들고 도망치듯 호주로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을 아빠와 연락 한 통 하지 않은 채 나는 꼭 무언가를 이뤄내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나의 반복되는 다짐을 들으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와 아빠 사이에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때로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돈을 벌며 부모의 짐을 덜어주길 바라면서도 내가 읊어주는 바깥세상 이야기를 듣고 난 뒤면 엄마의 눈은 늘 반짝였다. 21살에 결혼을 하고 나를 낳은 엄마가 살아보지 못한 청춘을 내가 대신 살아주고 있음은 엄마에게 작은 희망이자 꿈이었다. 노트북이 들어있는 에코백을 둘러메고 집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는 나를 보며 엄마는 작가가 되어있는 나를 꿈꾸기도 했을 것이고 서호주 사막을 횡단하고 사람들을 인솔하는 나를 보며 언젠가 나와 함께 호주를 여행하는 모습을 자그맣게나마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평생을 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던 엄마였기에 당차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내 뒷모습에 작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나는 서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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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34살이 되어가는 동안 몇 번의 이직과 이사를 거듭하며

먼지만 날리는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만큼 때로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아빠가 원하는 '남들처럼'의 삶은 쉽지만은 않았지만 매달 잊지 않고 채워지는 통장의 잔고가 위로가 되었고 몇 년 전 호주에서 엄마에게 다짐했던 것들을 조금씩 외면하고 또 포기하며 어느새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삶을 사느라 잊고 있던 다짐들이 떠오른 건 얼마 전 엄마와 나누던 대화에서였다. 샛별이에게 젖병을 물리며 엄마는 무심히 말했다.


"엄마는 네가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엄마가 되었잖아~"


"아니~ 남들이 다 되는 거 말고..."



결혼을 한 뒤 나조차도 조금씩 잊어가고 있던 다짐들을 엄마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부끄럽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엄마가 되는 게 얼마나 힘드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실은 엄마의 그 말들은 내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엄마는 당신의 딸이 엄마로서 살아가기만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하라는, 아기는 언제 가질 거냐는 주변의 흔한 잔소리도 당신은 나에게 무심코라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은 내가 '무엇'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기가 짧은 낮잠에 빠진 사이를 빌어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엄마로서의 삶 외에 내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를 다시 떠올려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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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댓글을 남겨주시는 모든 분들 덕분에 오늘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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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철들지 않은 30대.

걷고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들은 모두 따뜻한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여전히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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