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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Jun 19. 2023

계절은 모두 너에게 배웠어

슬기로운 산책일지 


 걷는 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 괜찮은 산책 메이트가 있다. 보폭을 맞춰 함께 걷기 시작한 지 벌써 3년 하고도 6개월의 시간이 흘렀으니 우리가 함께 한 거리를 계산해 보면 아마 서울에서 지금 지내고 있는 울산까지 두 번은 거뜬히 왕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산책을 좋아하는 녀석 덕분에 나는 거의 매일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두 돌을 앞둔 남자아이 그리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는 건 꽤나 난이도가 높은 일이라 '산책'이라 부르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행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적어도 하루 한 번, 이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는 산책을 가자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무척이나 간절한 까닭이다. 걷는 걸 꽤나 싫어하는 남편으로 인해 산책의 9할은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 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였지만 하루종일 아이에게 시달리다 남편에게 잠시 아이를 맡기고 심바(강아지)와 단 둘이 산책을 나갈 때면 왠지 모를 쾌감에 육아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이제 4살이 된 심바는 무척이나 활동적인 편이다. 지나는 개에게 물린 경험이 여럿 있어서 지금은 다소 소심한 성격이 되었지만 산책을 나설 때면 세상에서 가장 발랄한 강아지가 된다. 신혼 1년 차가 되었을 때 우리의 가족이 된 녀석은 서울시 중랑구에서 본격적인 견생을 시작했다. 남편은 원래 동물을 썩 좋아하지 않는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유기견센터에 봉사활동을 다니던 나를 보며 결혼 1년 차가 될 즈음, 강아지를 용감하게 데리고 왔다. (본인은 관심도 없었으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한 결정이었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으니 시행착오가 꽤 있었지만 훈련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유튜브와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가며 이제야 반려인으로서의 내공이 조금 쌓인듯한 기분이다. 





 회색 건물로 빼곡한 서울에서는 산책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늘 아쉬움이 있었다.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 구리 한강공원으로 향하곤 했지만 산책을 위해 매일 그곳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 가장 가까운 중랑천까지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에 살았기에 아쉬운 대로 집 주변의 작은 산책로만 하염없이 걸어야 했다. 이따금 일탈 삼아 새로운 골목을 탐방해 보는 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베트남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고 임신을 알게 된 나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친정이 있는 시골로 내려와 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마 이 결정의 최대 수혜자는 심바가 아니었을까. 시골에 내려온 이후로는 심바의 세상이 초록으로 가득해졌다. 서울에선 행여나 이상한 것들을 주워 먹을까 늘 발 밑을 살피며 걸어야 했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고향에서는 그럴 염려가 거의 없었다. (물론 봄이 되면 간혹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을 만날 때도 있지만 말이다) 고향에 남아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친구와 고민을 털어내기 위해 걷던 길에는 늘 심바가 함께였다. 임신 3개월 차에 시작해 출산을 하러 가는 날까지 비 오는 날이나 날씨가 너무 궂은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읍내를 가로지르는 작은 하천을 따라 적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 동안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늘 걷는 길이지만 그 길이 매번 다르게 느껴졌던 건 아마 계절을 마음껏 음미하는 심바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바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다가도 자주 멈춰 서서 시간이 흐르는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와 풍경이 마치 처음 마주하는 것인 듯 말이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가기 전까지 19년을 살았고 또 어른이 되어 돌아와 다시 3년째 고향살이를 하는 중이지만 이 한적한 읍내를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본 일이 없다. 우리가 이곳에 살아가는 동안 단 하루도 같은 풍경이 아니었노라고 심바가 나를 일깨워 주었다. 매일을 싫은 내색 없이, 해맑게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새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심바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는 누구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었다. 롱패딩 사이로 스며드는 칼바람에 옷깃을 여밀 때도 심바가 멈춰 선 목련 나무에서는 봄을 준비하는 목련의 꽃봉오리가 얌전히 맺혀있었고 이내 봄이 오고 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는 겨울바람 속에서도 아주 조금씩 계절이 흐르고 있던 것이다. 그 장면을 마음에 담고 유난히 추운 겨울을 감사한 마음으로 보냈던 기억이 남아있다. 요즘은 강변을 따라 노란 금계국이 흔들리는 중이다. 심바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꽃이라 산책을 하다가도 멈춰 서서 함께 사진을 찍어준 기억이 여럿이다.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 피어났으니 한동안은 해가 조금씩 길어지겠지. 심바와 몇 번의 산책을 더 하다 보면 금세 매미가 매앰- 매앰-하고 우는 소리와 마주하게 될 테고 말이다. 





 오늘은 아이 그리고 심바와 함께 저녁 산책을 다녀왔다. 일곱 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석양이 지기 시작한 덕분에 느지막이 산책을 나갔지만 여름이 오는 모습을 선명히 담으며 걸을 수 있었다. 사실 요즘의 나는 살면서 가장 우울한 시간들을 보내는 중이다. 나라는 존재를 돌아보며 싹도 틔우지 못하고 땅 속에서 얼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남편에게도 마음이 꽤 닫혀버려서 결혼을 했지만 혼자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상담을 다니며 선생님이 나에게 해주신 말씀 중 하나는 그래도 나에게 '산책'이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것이었는데 오늘 문득 그 말씀이 떠오른 이유는 나와 함께 보폭을 맞춰 걸어주는 존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우리를 둘러싼 풍경이 매일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해 주었고 말이다. 

 우리의 걸음을 따라 하루하루 계절이 흐른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아주 조금씩 자연이 색을 달리하고 있는 중이다. 나도 오래 잿빛 겨울에 멈춰있지만 분명 어딘가에서는 봄이 오고 있음을 믿어보기로 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심바가 찾아낸 봄의 흔적이 내 안에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춥고 시린 겨울을 겪어낸 냉이가 깊고 단단한 향을 품게 되는 것처럼 분명 나도 안으로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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