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간절한 목마름으로.
산티아고에 다녀온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산티아고를 다녀오고 나서 나는 ‘조금은 성숙해’ 졌을까? 대답을 먼저 하자면 나는 ‘글쎄요..’라고 말할 수밖에. 육아를 하며 우울을 앓고 있는 나에게는 산티아고를 걸었던 흔적도 증발해 버린 지 오래이다. 가끔 내가 그곳에 다녀왔음을 상기시켜 주는 건 엄마라는 존재인데 이따금 내 발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엄마는 넌지시 말하곤 했다. “네 발은 도대체 너라는 주인을 만나서 얼마나 고생을 한 거니..”라고. 그때 발바닥에 딱딱하게 자리 잡은 굳은살들은 해를 더해가며 더 견고히 자리 잡았고 나는 그들을 마치 산티아고를 상징하는 가리비처럼 품었다. 잊을 때마다 엄마가 그 말을 해대는 통에 나 역시도 발바닥을 볼 때마다 산티아고를 걸었던 나를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되는 것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이 있을 뿐. 첫 해에는 하루 30km씩 땅을 내디뎠던 발바닥의 감각을 잊었고, 두 번째 해에는 들판을 노래하게 만들었던 바람의 촉감을 잊었고, 세 번째 해에는 밀 밭의 냄새를 잊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흘려보내며 산티아고를 걸으며 차곡차곡 쌓았던 감각들이 하나씩 증발되었다. 이제 10년 차가 되니 그때 일기장에 가득 담아두었던 감정과 사진을 통해서야 비로소 내가 한 때 그곳에 존재했음을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순례길 위에서 만났던 H와 매년 안부를 주고받을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산티아고에 다녀온 지 벌써 5년이 흘렀네”, “우리 이때 참 어렸고 투박했다. 벌써 8년 전 일이야”라고 말이다. 비로소 올 해는 “우리가 그곳에 다녀온 지가 벌써 10년 전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자그마한 숫자가 귀여웠고 곧 순례길을 디딤돌 삼아 어딘가로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두 자릿수에 접어들게 된 올 해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언젠가 다시 그 길 위에 서겠노라 다짐하고 돌아왔지만 H도, 나도 여전히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은 끊지 못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세상에 잔뜩 굴러먹으며 지쳤고 또 여전히 각자의 노란 화살표를 찾아 헤매는 중이기 때문일 테다. 나보다 3살이나 어린 H였지만 나에게는 영적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살면서 그렇게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미 결혼한 아낙의 모습이 되었지만 산티아고에 다시 가게 된다면 약골의 남편과 걷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남편과 걷게 된다면 그의 배낭까지 내가 짊어져야 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묵묵히 1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걸으면서도 건치 미소를 잊지 않았던 영적 스승과 기회가 된다면 다시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현실에 돌아와서 내가 순례길에서 읊조렸던 몇몇 다짐들은 ‘이상’과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힘든 시간들을 겪어내며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던지 ‘돈보다 본질에 가치를 두고 살겠습니다’라던지. 힘든 시간들을 겪어내며 나는 꽤 지쳐서 다소 무기력을 앓게 되었고, 돈을 좇지 않아 돈과 점차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게 되었다. 순례길에서 다짐했던 것들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지향주의자로서는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제야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꿈에 잔뜩 부풀어있던 이상주의자였음이 아주 확실해졌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닮아있는 것이라곤 가벼운 통장의 잔고와 검게 그을린 (아무도 한국인이라고 예상하지 못하는) 피부뿐이었다.
‘산티아고’라는 여정의 시작은 스물한 살의 도서관이었다. (어디서부터였는지 오래전부터 브런치를 읽어오신 분이라면 아실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끄적여봅니다) 외향형 인간이지만 혼자만의 충전이 종종 필요한 유형의 사람인지라 공강 시간이면 도서관 3층의 여행 서적 코너를 아지트 삼아 머무르곤 했다. 열일곱이 되던 해, 친한 친구가 생일 선물로 건넨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라는 책을 읽은 이후로 오래도록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게 되었고 그것이 제주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만들었으며 여행 수필이 가득 꽂혀있던 책장으로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스티브잡스가 말하던 ‘Connecting dots’와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이 더디 흐르는 그곳에서 어느 날 영화처럼 작은 먼지 한 올이 비행하는 모습을 우연히 감상하게 되었는데 먼지가 내려앉은 곳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책을 만났다. 그날은 내가 산티아고를 알게 된 첫 번째 기억이다. 많은 트랙이 머릿속에서 휘발되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유독 선명해서 글을 쓸 때마다 제주도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3층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것만 같다.
순례길을 걸으며 깨달은 바가 많았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다른 형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삶을 살아온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전화영어를 부지런히 했던 나 자신을 칭찬했던 것 같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스스로를 포장해야 할 것 같았고, 어떤 질문들은 에둘러 피해 갈 수도 있었는데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를 할 때면 피해 갈 수 있는 표현이 없어서 되려 솔직해졌다. 그들과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고 말이다. 날 것의 마음을 꺼내놓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오래 곪아있던 마음이 치유받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걷는 속도가 비슷해 자주 마주치던 일본인 친구와 오래 보폭을 맞춰 걷던 날이었다. 이 길을 왜 걷게 되었는지 철없이 물었던 내 질문에 그녀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보였다. 살아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만나지 않았고, 기일에도 찾지 않은 아버지의 뼛조각이라며 덤덤하게 웃던 얼굴. 짧은 휴가마다 산티아고를 조금씩 걷고 또 걷곤 하셨던 아버지가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닿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마음의 화해를 위해 먼 길을 날아온 것이었다. 부디 너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마음의 상처를 털어내고 행복하길 바란다며 축복을 건네는 그녀를 안고 우리는 한참을 울었다. 그러고 나자 개운하리만치 마음이 개었다. 아빠의 폭력 이후, 채 자라지 못했던 마음속의 아이가 그날 이후로 조금 성장한 기분이었다.
산티아고 책을 처음 집어든 이후, 희미하게 그려진 밑그림 위로 수많은 덧칠을 했다. 그 당시에 도서관에 꽂혀 있던 몇 안 되는 ‘산티아고’ 책은 모두 섭렵했고 800킬로미터의 여정을 위해 호주에서 반년동안 매일 40분씩 걸어서 출퇴근을 하며 체력을 길렀다. 아르바이트 비용을 차곡차곡 모아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그다음 돈이 모이면 파리에서 산티아고의 시작점인 생장 드 피드포르까지의 기차 티켓을 샀고 또 그다음 주급으로 오래 걸어도 괜찮은 신발을 샀다. 선명하게 꿈을 그리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점차 미완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렇게 오래, 간절히 바라던 꿈이 현실이 되는 일을 경험하고 돌아와 나는 그 후로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때만큼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을 찾지 못했다. 그 시절의 마음이 다른 것들을 모두 녹여버릴 만큼 뜨거웠던 탓일까.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늘 뜨거운 마음으로 꿈꾸며 살 수는 없겠지만 아주 작은 나의 바람이 있다면 살면서 꼭 한 번은 그때의 간절함으로 무언가를 완성시켜 보는 것. 무모했던 시절의 용기를 떠올리며 내일의 나에게 이 글을 비행기 삼아 건네본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고. 길을 걷기 시작하면 노란색 화살표들이 그날의 산티아고처럼 길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