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또 다른 하루를 살아내느라 고단했던 시절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살았으니 피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먹고사니즘으로 바쁜 남편은 툭하면 야근을 했고 좁고 비싼 전셋집에 몸을 기대어 잠들고 나면 또다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7호선을 타는 일상이 반복되던 중이었다. 그때 우리의 삶에는 ‘특별함’이라 부를만한 것들이 부재한 상태였다. 결혼을 하고 나면 삶이 굉장히 근사해지는 줄 알았는데 원룸에서 신혼부부 대출을 받아 조금 더 넓은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대출이자를 갚느라 부지런히 살아야 하는 이유만 하나 더 생겨났을 뿐이었다. 선뜻 특별하다고 여길만한 것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는 나는 늘 오지도 않은 것들을 걱정하며 사는 성격의 사람이라 무언가를 책임지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고작 인근의 유기견 보호소에 쓰지 않는 담요를 모아들고 봉사를 다녀오는 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묵묵히 나를 지켜보다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건 바로 살아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온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특별한’ 일이 되었다.
“선배! 이제 선배가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 500가지 더 늘어났어요!”
SNS에 새 식구 사진을 올리자 주변인들은 우리의 가족 구성원이 아기가 아니라 강아지임에 크게 놀라며 연락을 해왔다.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별다른 놀라운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평소에 워낙 깔끔을 떨던 남편을 아는 주변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먼지라곤 용납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털 달린 동물을 키우다니! 그러던 와중에 남편의 후배에게서 받은 메시지는 반려생활에 첫 입문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반려생활을 시작하는 주변인에게 이렇게 말해주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우리가 하게 될 경험이 500가지나 되다니 얼마나 특별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일까. 물론 반려인이 된 후, 그 후배가 말했던 500가지의 경험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되는 데까지 크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반려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포기하게 된 것들은 내가 얻은 것에 비하면 기꺼이 내려놓아도 되는 것들이었노라 고백하는 바이다.
나의 첫 반려생활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운동회가 되면 학교 앞은 온갖 진기한 것들을 파는 어른들로 늘 북적였다.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께서는 본인들이 오지 못하는 대신 운동회가 되면 동전 몇 개를 쥐어주셨는데 나는 짤랑거리던 500원짜리 두어 개가 잘 있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루종일 만지작거리곤 했다. 운동회가 끝나면 홀린 듯이 병아리를 파는 할머니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말도 안 되는 작은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비닐봉지에 덜렁 병아리를 담아주는 것도, 병아리를 빨갛고 파란색으로 염색한 것도 모두 생명에 대한 학대라고 생각되지만 그 시절에는 운동회가 만들어낸 풍경이었노라 애써 미화해 보는 바이다. 그렇게 집으로 데리고 온 병아리들은 (한 마리는 외로울까 봐 늘 두 마리 정도를 데리고 왔다) 한결같이 우리 집에서 잘 자랐다. 네 식구가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 거실에서 녀석들은 아빠가 만들어준 박스집을 보금자리 삼아 지냈고 할머니댁에서 얻어온 송아지의 가루사료를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이름도 유치하지만 지어주었고 말이다. 병약한 한 두 마리를 제외하고 병아리들은 잘 자라나서 닭이 되었다. 커다란 닭을 아파트에서 계속 키울 수는 없기에 덩치가 커지기 전에 녀석들은 할머니댁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곤 했다. 할머니댁 마당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주말마다 꼬꼬를 보러 가곤 했는데 훗날 한 마리는 고양이에게 잡혀가고 한 녀석만 남게 되었다. 남은 닭은 얼마나 영특했는지 이름을 부르면 '꼭꼭꼬'소리를 내며 숨어있는 나를 찾아왔고 파리를 잡아 주시는 증조할머니를 강아지처럼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는데 점심을 먹으라며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자리에 앉고 보니 그날의 메뉴는 닭백숙이었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꼬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이었지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점심이 다 지나도록 흐느껴 울었다. 그런 나를 보고 할머니는 그깟 닭이라며 만원을 던져 주셨지만 그날 느낀 배신감이 어른이 된 지금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여름에 느낀 감정은 나를 부쩍 성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전으로도 할머니댁에서 키우던 강아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개장수에게 팔려가서 아마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리라.
서른다섯,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넓어진 만큼 알아차리게 된 것이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유독 ‘여름’이라는 계절이 슬프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볼 때면, 포인핸드나 당근마켓에 반려동물을 찾는다는 글이 올라올 때면 늘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 부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하고 말이다. 눈을 마주치고 마음을 나누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 계절. 어린아이의 울음이 어른의 욕심에 의해 덮이기도 하는 계절. 임신을 하고 할머니댁이 있는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개장수 트럭이 지나는 소리를 여럿 들었다. “개 삽니다~ 개 삽니다~”라는 투박하고 묵직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지나간 후, 건너 산에서 들리던 개의 짖음이 사라졌고 나는 문득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