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라에서 취향을 넓혀가는 일
6개월의 시간 동안 베트남에서 지내며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하나씩 늘어가는 중입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가는 건 제가 주로 해나가는 여행의 모습이기도 하고 말이죠. 호주에서 지내는 일은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이제 서서히 옅어져 가는 중이고, 살면서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한 베트남이라는 곳에서 새로운 책장에 기억들을 하나씩 채워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잖아요. 며칠 전 만났던 선배가 그러더군요. 인생이 한 그릇의 수프라면, 제가 가진 계획은 포크라고요. 결국 포크로 아무리 수프를 뜨려고 노력해 봐야 되지 않는다는 농담을 건네신 것이었지만 그 말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일요일 아침은 남편이 출근을 하지 않는 덕분에 조금 여유로운 편입니다. 새벽 6시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며 베트남에서 좋아하게 된 것들을 남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작고 소박한 것들을 유난히 아끼는 저는 일상에서 행복을 줍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의 작은 행복을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따끈따끈한 그림과 함께 오늘의 일기를 남겨봅니다.
1. 카페 쓰어다
베트남 커피는 우리가 생각하는 커피와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물론, 에어컨이 장착된 카페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주문이 가능하지만 에어컨 없이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현지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울지 모릅니다. Cafe Den이라는 것이 있지만 아메리카노를 떠올리며 이 커피를 마시면 깜짝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약을 들이켜는 기분이거든요. 굉장히 진하고 새까만 커피가 나올 거예요. 물을 한참이나 더 타서 마셔야 비로소 아메리카노에 가까워지는 맛이 됩니다. 그 경험 이후로는 현지 카페에 가면 카페 쓰어다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한 베트남식 연유커피로 달달하고 진한 커피라 더위와 잠을 한꺼번에 달아나게 할 수 있는 메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추출 커피 가격에 비해 저렴해서 부담 없이 마시기에 적당한 메뉴입니다.
2. 오토바이
그랩과 Xanh SM이라는 오토바이 택시는 제가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입니다. 차를 타고 다니면 물론 좋겠지만 오토바이를 타면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더 많기도 하고, 골목을 여행하는 골목 여행자가 된 기분이 들어서 오토바이를 자주 타고 다닙니다. 매일 다른 모습의 운전자를 만나지만 그들의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의 책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짊어진 무게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거짓을 담지 못하는 뒷모습은 삶을 부지런히 이어가는 누군가의 하루를 조심스레 짐작케 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그 시간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꼭 그만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3. 소고기 쌀국수
6개월쯤 한 곳에서 꾸준히 살았더니 집 주변에 단골이라 부를만한 곳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소고기 쌀국수만 전문으로 하는 현지 식당인데 5살짜리 꼬마도 좋아하는 곳이라 토요일 아침에 아빠가 출근을 하고 나면 아이의 손을 잡고 쌀국숫집으로 향합니다. 3500원짜리 쌀국수 한 그릇을 시켜 아이의 작은 그릇에 나눠주고 두 눈을 마주치며 아침을 먹는 이 시간을 무척이나 아낍니다. 빵을 튀긴 반꿔이 Banh quay라는 것도 두 어개 집어서 쌀국수 국물에 찍어 먹으면 이 녀석이 은근히 별미거든요. 아들은 이미 그 맛을 알아버려서 어떤 날은 국수보다 튀긴 빵을 두세 개 국물이 듬뿍 찍어서 먹고 돌아오곤 합니다. 이 소박하고 작은 시간이 언젠가 꼬마가 자라서 쌀국수를 먹을 때마다 따스함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봅니다
4.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
세상에는 무섭고, 위험한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지만 삶의 반경이 평범한 저는 비교적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입니다. (밤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파트 현관에서 일하시는 경비 아저씨를 비롯해 아파트의 주민분들은 개구쟁이 꼬마아이에게 늘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무척이나 너그럽습니다. 한국에선 행여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봐 늘 ‘안돼’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베트남에서는 ‘안돼’라는 말을 조금은 덜하게 되는 것 같아서 육아를 하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의적인 편이라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한국사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국인이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는 곳이 바로 베트남입니다.
5. 강렬하고 열정적인 나라
베트남 국기는 강렬한 빨간색 바탕에 노란 별 하나가 있어서 기억하기 쉬운 모습입니다. 베트남이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는 붉은색이 독립을 위해 흘린 피, 노란색은 베트남인을 상징했으나 남과 북의 통일 이후로는 별은 공산당의 리더십을, 붉은색은 공산 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뜻이 바뀌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애국심이 강한 편인데 얼마 전 독립기념일 50주년을 맞이하여 큰 행사가 열렸는데 시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 행사를 보기 위해 호치민 시내로 올만큼 나라에서 개최하는 행사의 참여도와 관심이 높은 편입니다. 행사를 기념하며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문화였습니다.
6. 사이공 맥주
여행을 할 때면 그곳에서 생산되는 술을 마셔보는 편입니다. 한국의 소도시를 여행할 땐 그 지역의 막걸리를 사서 마시는 일이 좋아서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러서 지역 술을 사다 먹어보곤 했습니다만, 해외에서는 막걸리 대신 맥주를 사서 마시고 있습니다.
호치민에 정착하고부터는 호치민의 옛 이름인 ‘사이공’을 따서 만든 사이공 스페셜을 주로 마십니다. 저렴한 가격에 베트남 음식과 페어링이 더 잘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노천 식당에서 맥주를 주문할 때면 기다란 얼음을 컵에 넣어 미지근한 캔맥주를 가져다주는 모습도 이젠 꽤나 익숙해진 지 오래입니다.
7. 반미
베트남에 오기 전에는 부끄럽지만 반미가 이곳의 대표적인 메뉴라는 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만, 베트남에 입성하 고나니 반미는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메뉴임을 깨달았습니다. 살짝 구워내 바삭한 바게트빵을 반으로 가르고 그 사이에 햄, 계란, 토마토, 고수, 오이 같은 재료를 넣어주는 간편한 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식당의 반미는 하나에 3-4000원을 주어야 사 먹을 수 있지만 사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침으로 먹는 반미는 하나에 1000원 정도의 시세입니다. 길거리에서 판매하고 있어서 때론 배탈의 위험이 있긴 합니다만, 현지사람들에 섞여 길거리에서 반미를 사다 먹는 것이 이젠 저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습니다.
8. 싱싱하고 값싼 과일
저와 아들은 망고를 꽤나 좋아하는 편입니다. 카페에 가면 커피를 마시거나 망고 스무디를 주로 마시곤 하죠. 길을 가다 망고 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베트남에서는 망고 스무디를 주문하면 망고를 듬뿍 잘라 넣어서 스무디를 만들어줍니다. 망고 인심이 아주 좋아요. 그리고 대게는 아주 진하고 깊은 망고를 음미하며 먹을 수 있죠. 저희 부부는 가끔 소주를 한 잔 기울이고 돌아오는 길에 길거리 주스 가게에서 망고스무디를 주문해 마시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해장에도 꽤 탁월한 선택이거든요. 망고뿐만 아니라 구아바 그리고 금귤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싱싱한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과일가게를 잊지 않고 들리고 있어요.
9. 길거리음식
만드는 방법을 보지 않는다면 이곳에선 뭐든 먹을 수 있다는 우스갯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만, 이 말은 9할은 정답이긴 합니다. 담배를 피우던 손으로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매연이 있는 길거리에서 음식을 팔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식품위생을 생각한다면 먹을만한 것이 그다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왔으니 조금 관대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밤시장은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아이와 함께 밤시장에서 튀긴 고구마볼인 봉봉을 사 먹었던 기억이 꽤나 좋았어요.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해 천막 아래서 아이는 고구마볼인 봉봉을, 저희 부부는 오징어 볶음과 맥주 한잔을 마시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던 시간이 예쁜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때론 옆 테이블 현지인들이 주문한 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같은 걸 시켰는데 그 음식이 맛있을 때 기분이 얼마나 짜릿한지요. 이건 낯선 나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베트남의 어떤 것들을 좋아하고 또 기억하고 계신가요?
삶의 바운더리가 정해지고 나면 늘 비슷한 것들을 먹고, 익숙한 사람을 만나고, 가던 곳만 가는 그런 삶의 패턴이 생깁니다. 그리고 가끔 그 원에서 벗어나고 싶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권태의 순간마다 크고 작은 도전들이 필요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누군가의 아껴둔 취향을 이 글을 통해 나누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렇게 또 삶의 반경이 넓어지는 경험이 되기도 하겠네요.
베트남 생활 6개월 차가 경험해 보면 좋을 즐거움을 나눠주신다면 꽤나 기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