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에세이 #7. 네가 바라보는 엄마의 뒷모습이 삶의 증명이 되기를
아이와 함께 클라이밍장에 가기 시작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주말 동안에는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고,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날들은 생각보다 훨씬 긴 숨을 요구했다. 그러니 내게 허락된 운동의 시간조차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어야만 했다.
엄마 손을 꼭 잡은 두 돌을 넘긴 아이는 돗자리 한편에 앉아 고래밥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가끔씩 천장을 올려다보듯 높은 외벽을 바라보았다. 홀드를 움켜쥐고 높이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옮기던 아이는 때때로 “엄마, 또 올라가?”라고 묻곤 했다. 그 말은 마치, ‘오늘도 다시 해보는 거야?’라는 격려 같았다.
그 시절, 나는 무너질 듯한 마음을 겨우 지탱하며 살고 있었다. 멀어진 남편과의 관계와 식어버린 대화, 고향집에서조차 여전히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아빠와 부딪히는 일이 잦았던 나. 기댈 사람도,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어른도 곁에 없던 그때, 클라이밍장은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작은 틈’이었다.
온몸을 쓰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밍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위안을 주었다. 홀드를 쥐고 버티는 시간마다, 나는 나를 다그쳤다. ‘이것조차 견디지 못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어 ‘라고.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때론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로 암장으로 향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아이와 반려견을 품에 안고 견딘 2년은 지독할 만큼 외로웠지만, 외로움의 깊이만큼 자신을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감정을 던지듯 쌓아놓고 서로에게 흠집을 냈던 남편과 나 사이에는 묵직한 침묵이 가라앉았고, 그 틈에서 나는 조금씩 삶의 모양을 달리 그려나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도서관으로, 클라이밍장으로 향했다. 두 공간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언제든 머물 수 있었고,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열 달을 꼬박 품었던, 오롯이 나를 믿고 세상에 찾아와 준 아이를 떠올렸다. 내가 무기력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할 때도, 눈물을 삼키며 하염없이 걸음을 옮길 때도 아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구김 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릴 때면, 거짓말처럼 다시 벽 앞에 서고 싶어졌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끈기 있게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했고, 호주에서는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텅 빈 채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와서 지낸 4년의 시간은 오롯이 방황의 시간이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지만 그 무엇도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던 시간.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문득 엄마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랐다.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나의 최선이 넘어져도 주저앉지 않고, 무릎을 털고 일어서는 모습이기를. 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한없이 약하고 자주 넘어지더라도 사랑하는 존재 앞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해질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쌓아 올릴 수 있는 말과 문장 대신, 삶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눈앞의 홀드를 쥐듯, 오늘 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모습으로.
아이에게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들을 물려줄 수는 없어도 엄마는 늘,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오르던 벽을 아이가 기억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것만 같다. 돗자리에 앉아 바라보던 엄마의 묵묵한 뒷모습을. 떨어지더라도 다시 훌훌 털어내고 벽 앞에 서던 그 모습을.
그 뒷모습에는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는 삶의 증명이 담겨 있을 테니까.
#여전히클라이밍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