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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그것으로도 충분한 시절

이름 없는 곳으로 가는 지도

by Jessie


IMG_2442-3.jpg @ Esperance, Westsern Australia


호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위너와 함께한 ‘꽃보다 청춘’이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끝으로 호주를 떠난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었지만, 가장 간절히 바라던 순간을 마지막에 마침표로 찍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촬영으로 번 돈은 남김없이 호주를 여행하는 데 쓰자고. 그 다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그 시절, 나와 연애를 하던 사람은 해외 생활에 서툰 이였다.

서른을 막 넘긴 우리는 사연만큼이나 얇은 지갑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무모하고 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절의 치기는 오히려 우리를 단단히 묶어두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는 일주일의 휴가를 내고 호주로 날아왔다.


친구의 호의로 빌린 자동차를 타고, 서호주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바다를 향해 길을 나섰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 위에서는 목적지보다 속도계의 숫자가 더 선명했다. 어디로 가는지가 아니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누구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낯선 풍경 속에서,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헤어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시간. 목적지는 매일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졌고, 가난한 여행자들은 텐트 속에서 어설프게 잠이 들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여행은 보풀이 일어난 천처럼 투박했지만, 그래서 더 따뜻했다.


남극해의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해변에 누워 있는 캥거루와 눈을 맞추는 일들을 지겹도록 반복하면서 우리는 파도가 아니라 빛이 부서지는 장면들을 자주 눈에 담았다.

억수같이 비가 내리던 날, 에스페란스 캠핑장에서 깨어났을 때 텐트의 바닥은 이미 축축했고,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었다. 우리는 공용 주방으로 몸을 피했다. 사정을 알 만한 이들과 빗소리를 함께 나눠 들으며 웃었고, 젖은 옷을 말리며 서로의 의자를 내어주었다. 이름은 금세 희미해졌지만, 표정은 오래 남았다. 우리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곤 했다.





IMG_9957-2.jpg @ Kalbarri National Park, Western Australia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나는 물었다.


“돌아가면 뭐 하고 싶어?”

그는 오래 침묵했다. 대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말 대신 음악이 대답이었던 순간, 나는 우리가 돌아가는 길 위에 있음을 실감했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곁에 있는 사람과의 내일을 그려보았다.

그 여행은 단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이불속에 남은 온기처럼 오래 머물렀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날들이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텐트 문을 열고 침낭에서 발끝을 꼼지락거리는 이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넬 수 있는 사이. 하얀 입김을 뿜으며 웃는 일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시절이었다.







브런치 매거진용 하단 단단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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