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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Feb 17. 2019

안녕, 연남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주민(이었던 사람)의 회고일기

0. "저 연남동 살아요" 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다들 우와, 했다.

매일매일 상쾌한 연트럴을 걸어서 출근할 수 있고

학교 가는 길에 아기자기한 동네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연남동 주민의 특권이었다.



1. 사실 연남동은 그렇게 좋은 동네가 아니다. 

재개발 되지 않은 연남주택은 노후화 되어 있고, 연트럴을 벗어나 조금만 걸어 보면

반지하의 3평짜리 가게가 조금 많이 빈티지하다. 


불편한 교통, 낡은 동진 시장, 더러운 연남 지하보도.

연남을 진짜 아름답게 하는 맨얼굴들이다.


1-1. 연남동이 인스타에서 핫해진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고,

최근 새로생긴 반짝반짝하고 fancy한 가게들은 연남동 주민이 볼때 그 동네의 것은 아니다.



2. 난 연남동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살았는데 그때 내가 느꼈던 건 "연남동처럼 살고 싶다" 였다.

전통 부자들이 사는 깨끗한 연희동과 달리, 연남동은 밀려난 사람들의 개성이 살아 있다.


반지하 2-3평짜리 가게에 스케이트 보드 가게를 만들고, 지하보도에는 그래피티가 있고,

손님이 그리 많지 않은 자체 양조 맥주를 파는 수제 맥주 가게가 있다.

연가교 가는 길 연남동의 끝자락에는 수제 요거트 가게와 방앗간이 있고 화분과 커피를 같이 파는 주택을 개조한 특이한 가게가 있다.


이곳은 다 가진 사람들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으로 자신의 삶의 장을 꾸린 곳이다.



3. 싱가폴에서 유학 가서 적었듯이 잠깐 와서 들르는 것과 살아보는 것은 다르다.

방문자와 주민은 그 동네를 어떻게 느끼는지도 다르고, 동네와 맺는 관계도 다르다.


지난 날 연남동에서 깔끔하게 차려입고 연트럴 앞부분을 돌기보다는

자다 일어나서 부시시하게 맨얼굴로 연남동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여긴 내 동네니까.


연남동이 그저 그런 철길있는 동네에서 갑자기 핫한 곳으로 떠오르기 까지,

주민으로 살았던 2년 가까이의 시간이 좋았다.


3-1. 집을 옮겨야 해서 이곳저곳 돌아보니 연남동의 주택건물, 근린시설 건물은 다 상업용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진짜 연남동 스러움이 상업적인 화려함으로 대체되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4. 17살에 집나와 인천 송도, 경기도 용인, 연희동, 상암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았지만 

연남동을 뜬다니까 뭔가 이상하다.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고 내 보금자리를 마련한 곳.

대학 졸업반 시절을 함께하고, 빡치는 일이 있으면 피터오빠와 한잔하고,

JP오빠가 반지하 앨리스 사진 개인전을 열던 곳. 


여름이면 밤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까지 나가고 

싱가폴로 유학을 가기 전 수제맥주 가게에서 연남 에일을 한잔 홀짝이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새 산책하던 곳.


반짝이던 스물네살, 스물 다섯살의 시절이 여기 있다.



5. 해방촌 오거리로 이사를 가지만 앞으로 어딜 가든

연남에서 배웠던 연남처럼 사는 법을 내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없던 곳을 여러가지 이야기로 채우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나의 공간을 만들어 결국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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