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ssie Feb 07. 2019

13번째 지구산책 - 러시아

사할린의 고려인 2세분은 나한테 남자친구가 왜 없냐고 혼냈다

0. 사할린에 간다고? 거길 왜 가?

비행기 티켓 산 이후로 모두가 물어봤다. 아빠도, 인천공항 체크인해주시는 승무원도, 사할린에서 한인 출신 호텔 리셉션 분도. 오직 Bruce만이 멋진 곳인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0-1. 왜 가느냐면 너무너무 답답해서 도망쳤다.

싱가포르에서의 세상을 바꾸겠다는 호연지기는 어딜 갔는지 지난 8개월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나는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12월에는 4시간 이상 자본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간신히 체력을 70-80점대로 끌어올려 버티고는 있었지만 다크서클은 계속 짙었고 역동적이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답답했다.


정규직 전환이 될수 있기나 한 건지, 내가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게 맞는지,

고요하고 안정적인 재무 구조 속 차분한 분위기가 가끔씩 숨이 막혔다.

최선을 다해서 달리고 또 달렸는데 무언갈 하나 이룬 순간 내가 더 해야 할것들만 장황하게 펼쳐졌다.


0-2. 하루에 1도씩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죽는다. 지금 그런 독이 쌓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ㅇㅈ이는 나에게 점심을 먹으며 "행복한 바보"가 되는 걸 경계하라고 했다.


월급을 따박따박 받으며 알아주는 직장에서 시키는 것만 하니까 고민하지 않는다. 불안없이 매일 똑같이 지나가고 그저 그렇게 인정을 받는 나날. Negative Peace는 독가스처럼 퍼져서 결국 공기가 된다.


내가 지금 여기서 조금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고, 어떤 질서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공고해 지지 말고 계속해서 머리 꼭대기에 냉수를 부으라고 했다.


언젠가 해연이는 돌연 모험을 찾아 브라질로 떠난다고 했었고 난 그때 웃으며 해연이를 부러워 했던 기억이 났다. 내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던 문화 속에서 다시 미숙하고 어리숙한 존재로 시작할수 있는 곳이 어디지?

그렇게 블라디보스톡-사할린-인천 표를 예매했다.



1. 그리고 키릴 문자의 ㅋ도 모르는 나에게는 시련의 시간...러시아인들은 영어를 전혀 못알아듣는다. 혹여나 러시아 여행을 갈거라면 언어를 배워서 가세요.


길 잃어버리는 건 양반이고 2년 반동안 주인의 학대에 시달린 아이폰 6S 는 사할린의 강추위에 계속해서 꺼졌다. 러시아어도 못하고 처음왔는데 구글 맵을 못써서 당황하길 수차례... 공항의 환전 창구 앞에 줄 서 있는데 내 차례가 되어 은행이 문을 닫고 갑자기 휴대폰 충전 케이블이 고장나기도 했다.


눈이 신발 위까지 차서 발목의 피부가 빨갛게 부었고 호텔은 예약 내용과 달리 무료 조식 서비스와 세탁 서비스가 없어서 세제를 사서 직접 손빨래했다. 버스정류장 표지를 못읽어서 몇정거장 일찍 내리고 기차 탑승 시간 1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타서 뿌듯해했는데 역무원은 왜 나에게 티켓이 없냐고 검문했다. 죄송합니다..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사이트에 올려놓은 주소와 다른 주소에 있질 않나 사할린에서 코르사코프로 가는 버스 요금은 인터넷에 기재된 운임보다 올랐는데 난 그걸몰라서 한참 동안 돈을 적게 줬다고 러시아어로 혼나고.. 물론 혼나는 지도 몰랐다..그래도 사람된 눈치로 무슨 말인지 알아먹고 20루블을 더 냈다.



2. 그래도 그냥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틀려보는" 시간.

러시아에서 나는 세미정장을 입고 비즈니스 매너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닌 틀린 사람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틀려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거리를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나를 짓누르던 걱정은 바람에 밀려있었다.

여긴 나의 걱정이 적용되지 않는 사회니까.


이곳은 아침 9시에도 맥주와 보드카를 마시고

영하 10도에도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하는 러시아다.


한국에서 고작 두시간 비행기를 탔을 뿐인데 러시아는 한국과 인종도, 문화도, 언어도, 인식 구조도 다르다.

세상엔 다양한 삶의 양식이 있다.



3. 여행은 때론 아름답지 않다. 사실 여행이란 불편하고 미숙한 순간의 연속이다.

여행이 아름다운 이유는 생각 외의 반짝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블라디보스톡에서 사할린으로 이동하며 북한 사람 몇십 명과 체크인하는 경험 같은 것.


각자 책을 읽다가 게스트 하우스 호스트가 나누어준 체리 꿀을 먹고 어린시절 감기약 맛이 나서 토할 뻔한 경험이라거나,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이 많아서 기분좋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고려인 2세 김영자 할머니가 가방을 내 테이블 위로 내려놓더니 어디서 왔어, 서울? 이라고 묻는 깜짝 놀랄 경험,

(일본어 러시아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하시는 초엘리트 김영자 할머니는 나에게 결혼 했어? 라고 물어보더니 왜 남자친구가 없냐고 타박을 하다가 잘 있다 가, 라며 쿨내를 남겨놓고 돌연 나가 버렸다.)


인스타그램에 러시아 여행 사진을 올리자 싱가포르에서 만났던 러시아 친구 나디아가 다음엔 모스크바로 오라고 초대해주는 댓글,


1박을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청소년 음악단이 연주해주는 엉망진창 우쿨렐레 음악,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는 고려인 3세 마르게리타가 이 호텔에서 강동원이랑 백종원이 묵었다고 말해 주며

나한테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냐고 하는 잔소리 같은 것들.


 

4. 여행은 살아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여행은 이제까지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보는 것이다.


단 음식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여행 4일차에 갑자기 초콜릿 버터 케이크에 빠져서 홀 케익 절반을 먹어치웠고,

아침 저녁으로 체력 관리를 하며 웨이트를 하던 내가 운동을 딱 끊고 밤마다 백곰 맥주를 마셨다.


최소 주 3회 운동, 기름지고 단 음식 절제라는 평상시 원칙과 멀어진 시간.

좋아하던 수상 스포츠가 아닌 스키를 배워 볼까, 생각하는 시간.


이 시간을 통해 내가 더 유연하고, 용감하고, 비워진 사람으로 거듭났길 바란다.  

내가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 안에서 틀릴 수 있기를.



5. 체리 꿀을 준 호스트는 나에게 Tourist? 라고 서투른 영어로 물었다.

나는 Yes, 라고 했고 우린 마주보고 웃었다.


Lonely Planet. 우리는 모두 외로운 행성의 여행자다.

작가의 이전글 계속해서 꿈을 쫓는 게 꿈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