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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Dec 08. 2019

도망침의 기록

BGM - Smoke from distant fires, Will Jay

0. 모니카는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21일날 인도네시아로 돌아간다고 해서 오늘 오랜 친구 둘과 홈파티를 했다. 이태원 외국 책 서점에 들렀다가 모니카와 헤이즐을 만나 해방촌에서 점심을 먹고, 신흥시장을 구경한 후 우리 집에서 귤을 먹고 콩밭커피에서 사온 커피를 마셨다.


예전 회사 이야기, 주변인들의 사는 이야기, 앞으로의 커리어 이야기, 우리집에 어떻게 냉장고가 없이 사냐느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용감하게 모국을 떠나 한국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이 두명과 있다보면 나도 영어로 말하는 도전이 편했다. 돌아보면 큰 회사와 센트비 중 인턴십을 결정해야 했을 때 센트비에 갔던 건 내가 알게 된 사람들 덕분에라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1. 해방촌의 방문자들은 높은 언덕과 복잡한 골목 때문에 버스정류장을 찾지 못한다. 모니카와 헤이즐을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혼자 돌아오니까 갑자기 휑했다.

홈파티를 자주 하는 편이지만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다시 우리 집을 나에게만 편한 공간으로 바꿔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재즈풍 노래를 틀고 싶은 경우가 대다수니까.


둘이 떠난 후 조용한 고독을 혼자서 누려야 할 시간이었고 외로운 만큼 그들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곱씹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밤, 센트비를 그만두고 헛헛했던 날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때 연희동 골목을 산책하며 헛헛해하고 있었는데 모니카는 베스킨라빈스 기프티콘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해줬던 기억이 난다.



2. 어릴 때는 이 혼자됨과 헛헛함을 견뎌내질 못했다. 내 인생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고 비춰볼 수 있는 그 귀한 시간이 무서웠다. 그래서 사람 사이로 도망을 쳤다. 카톡 연락처마다 연락해서 오랜만이라며 연락을 잡았고, 그렇게 외로움이 무서워서 사회성이 좋은 척 했다.


2-1. 2019년은 여행으로 도망친 시기였던 것 같다.

다시 지난하게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무서웠다. 


달라진 사실이 있다면 여행하면서 그저 도망치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내 마음을 짚어보려고 했다는 거다.

그래서 사실 올해의 여행들은 삶을 회피하기보다는 다시 직면하기 위해 나 자신에게 시간을 주는 도망침이었던 것 같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마음고생 몸고생이 많았었다.



3. 이제는 이 헛헛한 시간을 나름대로 음미할 수 있게 됬다.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시거나, 글을 쓰거나 올리비아의 L-O-V-E 를 잠잠히 들으며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힘을 기르게 되서 다행이다.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그만큼 고민이 많은 지금 나이에 모니카와 헤이즐을 만난 건 작년이나 지금이나 행운인 것 같다. 내가 오롯이 혼자 고민하는 헛헛한 시간조차 맞서게 해주니까 말이다. 


내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가끔씩 불안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고민도 되겠지만, 그 시간을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채 앞으로 나아가는 건 괜찮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알면서 살 수는 없어."

- Lisa Kudrow(Phoeby Buffay 역), <프렌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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