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의 재활 리모트 일주일
0. 재활 훈련이 필요하다.
내 머릿 속에 콱 박힌 생각이었다.
겨우내 어찌어찌 이사와 가족 일과 이직 등등 인생의 난제들을 풀어냈으나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던 시기를 겪어내자 너덜너덜 해 진 채였다. 안그래도 작년 지친채로 일년을 달렸는데 쉴만 하면 자꾸 도전이 닥쳤다. 그 결과 4월의 나는 인간관계의 미련과 업무에서 오는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뭐 컨디션 관리를 못한 내탓일수도?!
지난 3개월간 마음이 먹먹해서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스트레스 관리 능력이 예전보다 많이 늘어서 다행이었고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 했다(실제로 주위사람들은 내가 너무 덤덤해서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고 했다).3월 31일날 환기를 위해 몸뚱이를 이끌고 제주 자전거 여행에 갔다가 오른쪽 무릎을 찍어먹고 사방에 멍이 들었다. 20대 후반 이상 여러분 지친 육신을 끌고 갑자기 여행을 가면 안 됩니다 크게 다칩니다..
부상이 생기자 일상에서 꾸준히 임하던 러닝과 요가, 배드민턴을 전만큼 날아다니며 하지 못했다. 차도 사야되고, 남은 출간 원고도 써야하고, 읽기로 한 책과 듣기로 한 강의들은 아이스박스에서 무제한 얼어가기만 하는 중(...) 이었다.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 하루에 책 한 권도 못읽는 나자신을 발견한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 둘다 재활이 필요하다고.
1. 강릉 금진해변의 일주일 살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퇴사 이후에도 괜히 남은 인터뷰 프로세스와 실업급여 신청, 건강보험, 기존에 고마웠던 분들께 연락 드리고 만나기 등등으로 정신이 없다가 12일 정도에야 이런 거 신청할 정신이 들었다. 12일에 바로 연락드려서 14일 -20일 일주일 살기를 신청하고 부랴부랴 필요한 간편식, 여행용 요가매트 등등을 샀다. 13일 저녁 약속 끝난 후에 짐을 싸기 시작했는데 (노답) 앞으로 일주일 이상 집을 떠날 여러분 반드시 짐을 이틀 전에는 싸시기 바랍니다 매우 시간이 많이 듭니다... 한달살기하는 사람들은 한달 휴가 낸 것 이전에 그 짐 챙겨서 간 그 자체가 대단함
난 결국 13일 밤 11시에 짐을 싸기 시작해서 밤을 샜다. 심지어 설거지나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해충 약 뿌려두기 등등도 하나도 안해놔서 그날 댓새벽에 다했다. 진심으로 너무 힘들어서 그냥 안갈까도 생각했다... 대학교때 배낭여행 간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짐이 많이 나왔다. 일주일 배낭여행이 아니라 일주일 살기니까 당연해 챙길게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일주일 이상 다른데서 살 여유가 없던 나에게 그런 레슨이 있었을리가..ㅠ
화장품이랑 샌들, 음식, 아이패드를 20인치 캐리어에 넣고 옷들은 백팩에 넣었다. 간편식 정도로 먹을 것을 싸는게 제일 어려웠는데 내 경우에는 피코크 나물 밥/볶음밥 팩이랑 식빵하고 땅콩버터를 대강 챙겨갔다. 요가도 계속 하고 싶어서 쿠팡 로켓배송으로 2만원대 레드밸런스의 TPE매트를 주문했다. 사실 원래 밸런시스나 만두카 여행용 매트를 사고 싶었으나 그런 것들은 좋은 재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1-2Kg 정도 된다. 짐이 생각보다 많고 차량으로 움직일 형편이 안되어서(주문한 차는 생각보다 매우 늦게 나온다 <- 이것도 처음 안 사실) 500g대로 가벼운 매트를 주문했는데(그리고 로켓 배송이 되는 걸로) 해변에서 요가 해보니 밀리기도 하고 딱히 그렇게 사용감이 좋지는 않았음. 아마 이번 일주일 살이가 끝나면 당근 마켓으로 보내고 제대로 트래블 매트를 살 것 같다.
2. 1시간 정도 자고 새벽 기차를 타고 강릉역, 시내버스를 타고 낙풍리 입구까지 와서 알로하 서프까지 걸어왔다 (도보로 20분 정도)
역시 순탄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나는 도착하자마자 강사님께 어제까진 괜찮았는데 갑자기 물이 겨울보다 차가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짐을 풀고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책을 읽다가 햇살 밑에서 졸았다. 저녁 5시 쯤에 물에 들어갔는데 진심으로 너무 추워서 살고 싶지가 않은 추위 + 바람은 강풍이 불어 안그래도 파도가 높은 금진해변에서 서핑하기가 더 힘들었다. 결국 30분만에 나왔고 저녁에 맥주를 마시면서 좀 글을 쓰고 영화를 본 뒤 피로에 쩔어 잠에 들었다.
3. 이튿날(오늘) 일찍일어나려했는데 피곤해서인지 일어나니 10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대강 세수를 하고 요가 매트를 들고 해변에 나가 요가를 했다. 햇볕이 어제보다 좋고 바람이 낮아서 다행이었다. 요가를 하고 들어오는데 요가 매트 때문인지 내 피부색때문인지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카페로 커피를 마시러 온 분들이 내가 직원인 줄 알고, 여기서 살면 자기 삶도 여유롭겠네~ 라고 했다. 저도 놀러 온 건데..
요가 후 <노마드 랜드>를 읽으며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셨다. <노마드 랜드>는 요새 늘어나는 캠퍼포스 족, 실버 노마드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건 다른 블로그 글에서 세론할 예정!
3시경 바다 부채길을 따라 조깅을 하고(무릎 부상 때문에 천천히 달림) 몸에 열을 낸 채로 서핑하러 물에 들어갔다. 어제보다는 덜 차가웠지만 여전히 차가움. 그래도 청량했다. 역시 바다는 내가 에너지를 발끝까지 떨어뜨렸을 때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다시 채워주는 그런 힘이 있다.
4. 강릉은 뭐든지 일찍 닫는다. 주위에 내가 들어가 앉아서 글쓰며 제일 늦게까지 있을수 있는 카페는 오후 8시까지인데, 그래서라도 아침 9시에는 일어나서 부지런히 운동하고, 글을 읽고, 써야할 것 같다. 우연인지 플라시보 효과인지 강릉에 오자마자 미루고 미루던 글을 한편 쓰고, 오늘 또 한편 쓰고, 책을 집중해서 읽는 속도도 조금은 빨라진 것 같다.
남은 날 동안 서핑과 요가를 즐기는 틈틈히 계획했던 글도 다 쓰고, 번역도 하고, 읽기로 한 것들을 다 읽어서 몸과 마음의 재활치료를 완전히 마쳤으면 좋겠다.
코로나 이전 디지털 노마드가 트렌드로 떠오르자 누군가는 자조하는 어투로 막상 발리에 가면 서핑하는 사람들을 지켜만 보고 노마드들은 어차피 일에 쩔어 지낸다고 했다. 서피 비치앞 리모트, 과연 가능한 걸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