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레이첼 (500일간의 썸머)
0. 난 뭐든 꽂히면 무서울 정도로 파고들고 불사르는 성격이다.
관심사는 또 넓어서 여기저기에서 진한 경험을 많이 한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 할 때는 외식경영 할 생각 없느냐는 말도 들어봤고,
인턴한 회사들에서 졸업하면 다시 돌아오라는 고마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뿌듯하기도 했다.
역으로 여기가 내 집이고, 이 분야가 내 천직이라고 생각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
넌 아니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피눈물을 흘려보기도 했었다.
0-1. 사람한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사람한테 더 빨리 몰입했었다.
이 사람은 내 가족이나 다름 없다고, 정말 잘 맞는 사람이라고 섣불리 단정짓고
너무 많은 걸 주고,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적도 많았다.
1. 난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서 남의 집 살이도 많이하고
천덕꾸러기로 살았던 시절이 길다보니 눈치를 많이본다.
고생도 많았고 아팠던 기억이 많아서인지 조금만 사랑을 받으면
여길 떠나서 내가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당차게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고,
내 이야기를 하는 용기를 가지기까지 너무 오래걸렸다.
2. <500일의 썸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레이첼은 말한다.
"그 여자가 오빠랑 취향이 같다고 천생연분이 되는 건 아냐"
좀 잘 맞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그 여자와 사귈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 여자보다 더 나은 여자와 사귈 수도 있다.
2-1. 여길 떠나서도 난 행복할 수 있었고
굳이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내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은 많았다.
잘 맞는 환경이나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경험을 할 수 있다.
3. 돌아보면 제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교훈은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게 꼭 정답이 아니라는 거였다.
국제통상이 하고 싶어서 외국어고에 진학해서
프랑스어를 배우겠다는 결정이
그 나이대에 할수 있는 내 자신의 최선이었고 용기였다.
전국 대회에 나가 보면 살다 온 친구들의 절반도 하지 못했을때가 있었다.
3년 가까이 국제캠퍼스에서 생활하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결국 Chief RA는 하지 못했고, 내 자신의 최선이
상대방이 원하는 정답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아프게 배웠었다.
4.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며 6개월 계약을 더 늘릴까 말까 고민했을 때,
나는 지금처럼 잘 맞는 회사를 찾지 못할까 걱정된다 했고
하린언니는 와인을 따라주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니가 아직 너무 어려서라고 했다.
언니 말대로, 좀 잘 맞고 안맞는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내가 한 단체에서 적을 둔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
내가 한 사람을 미치게 좋아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상대와 나의 케미를 항상 보장해 주지 않는다.
내가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을 수도 있고,
설령 잠깐은 잘 풀렸다 하더라도 언제든 상황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잘 맞는다고 해서, 내가 지금 좀 좋아한다고 해서
내 인생의 모든 목표가 거기 수렴할 필요가 없었다.
5. 이것밖에 없을것 같았는데 여기서 실패했을 때는 뼈아프다.
사실 뼈아픔은 자산이 될 수도 있어서 괜찮다.
경계해야할 것은 이젠 내가 쓸모없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것밖에 나한테는 없는 것 같았는데 이젠 내가 잘하는 게 뭔지 모르는 순간.
지난했던 내 시간을 돌아보며 적는 글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길.
연애 상대를 정해놓고 찾는 것이 아니듯이, 인생에서 기회는 만나는 거다.
내가 찾아서 만나든, 우연히 만나든, 만나서 잘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
세상에 천직이라는 건 없고, 꼭 지금 하고 있는 게 아니면 안될 필요도 없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보다 다재다능 할 수 있다.
오빠가 썸머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알겠는데, 난 아니라고 봐.
지금은 그냥 좋은 점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다음번에 다시 생각해보면 알게 될 거야.
- 500의 썸머, 레이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