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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May 25. 2019

스타벅스 마니아 Y양과의 데이트

  "어! 저기 스타벅스다. 우리 여기 내려달라고 할까?"

스타벅스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머지, 친구들에게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몽땅 다 스타벅스 충전금을 받았다는 Y양. 핸드폰에서 그 충전금이 썩어가고 있다는 말에 안타까워하던 터라 차창 밖으로 스타벅스가 보이자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러나 12인승 차의 맨 뒷좌석에서 속닥거리는 우리의 대화는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차는 500미터는 더 가서 멈췄다.

 

 입원한 후 처음으로 참석한 병원의 야외 프로그램으로 근처 관광지를 왔는데 운이 나쁜지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다들 오는 내내 차에서 벚꽃 구경은 이미 다 마친 터. 생각보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근처 카페나 가자는 분위기였고 그때 우리를 인솔하고 온 과장님 카페에서 차를 한 잔씩 대접하겠다고 외쳤다. 오케이!

 그러고 보니 다들 병원 밖 아니, 자기 병실 밖으로도 잘 안 나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외출을 해서 카페를 간다는 것도 엄연한 야외활동이긴 하다.

 차에서 내려 다른 환자분들께서 대추차와 아메리카노를 외치며 전방에 보이는 카페를 향해 걸어가실 때, Y양과 나는 스타벅스 프라푸치노를 외치며 양해를 구한 후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진정한 자유시간이다.


 우리는 조금 전 지나쳐 온 스타벅스를 찾아 비 오는 벚꽃 가로수길을 걸었. 역시 벚꽃길은 승합차 안에서 우르르 보며 지나치는 것보다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야 제 맛이다. 비는 내렸지만 큰 우산을 함께 쓰고 여자 둘이서 재잘재잘 거리며 꽃길을 걸으니 나름 봄의 운치가 우리에게도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와 나는 야외 운동 때 얼굴을 보던 사이였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 둘은 입원 시기가 비슷했는데 그땐 서로 컨디션도 너무 저조했고 모든 것이 낯설었던 까닭에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서로 궁금해하며 지켜보고는 있었던 것이다. 이 병원에 미혼인 여자는 우리 둘 뿐이었으므로. 이제 서른두 살이라는 그녀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미 수년 전 벌써 뇌종양 수술을 했었고 많이 회복되었는데 최근에 갑작스러운 발작이 시작되면서 재발 진단을 받고 다시 치료 중이라고 한다. 말만 들어도 위협적인 뇌종양을 앓다니. 나도 폐가 아픈 환자지만 왠지 그녀가 더 안 되어 보였다.


 이렇게 아프기 전에 그녀는 책을 너무 좋아하고 시사에도 관심이 많아 주변 친구들은 사회이슈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Y양에게 물어보곤 했단다. 그러나 이제는 독서와 시사 이슈는커녕 글자를 쳐다보는 것도 머리가 아파 힘들고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도 말을 듣는 것이 힘들어 중간에 툭 끊어버려야 정도로 인지능력에 상당한 장애가 발생했다고 한다. 균형감 상실, 발작증세, 잦은 기억상실, 운동능력 장애, 기타 등등 그밖에  지금까지 겪었던 여러 장애와 증상들에 대해 느린 발음으로 이어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아직' 뇌를 공격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솔직히 스쳤다. 현재는 유방암이 폐로 전이되었지만 뇌로 전이되기도 한다고 들었으니 방심할 순 없다. 

그런데 난 뇌종양의 모든 증상들이 다 무시무시하게 들렸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귀에 꽂혔던 건 책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 책을 볼 수 없게 되다니. 그럼 난 누구랑 뭐 하며 놀란 말인가. 책을 쳐다도 볼 수 없게 된다면 심심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어쩌면 그 증상이 가장 무서운 증상이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스타벅스 전용 어플로 메뉴를 주문하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의 타이핑 속도가 아주 느렸다.  오타가 났는지 검색이 한 번에 되지 않자 나에게 핸드폰을 내밀며 타이핑을 부탁한다. '라푸치노'라는 단어의 자음과 모음 조합이 쉽지 않다고. 아. 또 마음이 짠하다.

 

 그 날, 비 내리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그녀와 나는 병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 우리들의 투병에 관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스타벅스에 와서 좋고 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 병원엔 카페는커녕 편의점도 없었으므로.


그러다 순간 생각했다.

이렇게 외출해서 보통 사람들 속에 있으면 우리도 그냥 평범하게 카페에서 수다 떠는 30대 여성으로 보이겠지? 그때 내가 별 이상이 없었고 그래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동네에서 도서관도 가고 마트도 가면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었겠지? 

이곳으로 오기 전의, 집에 잠시 두고 온 나의 일상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일상의 향기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게 또 감사했다.


 짧은 외출을 마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차 안, 아무 한 것도 없는 것 같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Y양과 나는  맨 뒷좌석에서 나란히 곯아떨어졌다. 차에서 내리자 다시 저마다의 입원실을 향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걸으며 다들 오랜만에 외출하니 좋았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제일 젊은 우리 둘만 빼고.

"언니. 안 피곤해요?"

"ㅋㅋㅋㅋㅋ. 웃음밖에 안 나네. 차만 잠깐 타도 징그럽게 피곤해요."

뭐 했다고 또 이렇게 피곤한 건지... 아. 이 놈의 컨디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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