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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킴라일락 Jun 11. 2019

'가만히 쉰다'는 것의 어려움

 서울 본병원으로 CT촬영을 하러 갔다. 5월의 장미가 활짝 핀 병원에는 사람들의 모습도 한층 더 활기차 있었고 공기도 신선했다. 그 사이, 나도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전처럼 기진맥진해하지도 않아서 마음껏 서울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은 약속이 하나 있다.      

 오랜만에 서울에 왔겠다, 컨디션도 괜찮겠다, 진료가 끝나면 동갑내기 유방암 환우 친구를 잠깐 만나기로 했다.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진행이 시작되면 무섭게 돌변하는 녀석이 암이였기에 최근 초기암 치료를 마치고 쉬는 그녀의 안부를 묻다가 약속을 잡게 되었다.  

 병원입구에서 만난 그녀와 차로 이동하면서 그간의 안부를 묻고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볼 때만 해도 가발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벌써 예쁜 커트머리로 자라 있었다. 패셔너블한 그녀의 스타일과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


 자기에게 먼저 연락줘서 너무 고맙다는 그녀는 그간 많이 바빴단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집에서 쉬기만 하니 너무 우울해져서 뭐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가게를 하나 차렸다고 한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사선 치료를 마치기도 전에 사업준비를 했었다니. 다시 돌아갈 안정된 직장이 있긴 하지만 스트레스가 많은 곳이라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더 자신의 사업에 매달렸으리라. 그 심리가 너무나 잘 이해되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일이라는 것이 어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고 알아서 잘 되는 것이던가. 신경쓸 것이 한 둘이 아니고 처음 접해보는 일에는 실수도 많아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꽤나 받게 된다는 것을 안다면 사실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암환자가 사업을 꾸린다는 것은 때론 목숨을 걸어야할지도 모를 어려운 일이다. 무리하지 말아야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애매모호한 건강수칙을 집어던질 용기 내지는 무모함을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원래 하던 일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익혀가야 하니 배움에 쏟는 에너지, 실행에 쏟는 에너지의 양을 내 컨디션에 맞게 잘 조절해야하고 그러면서도 최대한 일을 쉽게 풀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써야하고 무엇보다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으니 결정할 때 쏟는 에너지도 꽤나 들어간다. 이걸 우린 ‘신경쓸 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스트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쩌란 말인가. 그 정도는 어떤 일을 하든 당연한 과제인데 말이다.

어려웠다. 열심히 하라고 응원을 해야할지 무리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야할지.

 

 그녀는 요양병원에서 쉬고 있는 내 생활을 궁금해하며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나도 너처럼 요양병원이나 들어가 쉴 걸 그랬어."

그게 돈 아끼는 방법이라면서. 덜컥 겁없이 시작은 했지만 아직 매출이 불안정해 모아놓은 돈을 쏟아붓고 있단다. 그럼에도 다음 스텝을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며 열정만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부러웠고(번듯한 매장을 가지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건강이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나도 초기암 치료 이후 규모는 작았지만 과거 그런 저지리(어린 아이들이 일을 저질러 놓는 놀이) 경험이 있었고 사실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대신 예전보다 조금 더 안정성을 생각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가정이 있었다면 아마 어린 자녀들과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행복한 가정을 오래도록 꾸릴 수 있을까를 걱정하겠지만 미혼인 우리가 하는 고민은 전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딸린 가족이 아닌, 철저하게 나를 위한 고민이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암환자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투철한 생계형 자립심.

대단히 바쁘지도 못하면서 이 나이 먹도록 가정을 꾸리지 못한 여자로 보는 타인의 불편한 시선.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 뒤로 숨어살다가 덜컥, 보란 듯이 가져버린 엄청난 양의 시간 앞에 나 또한 보란 듯이 펼쳐보이고 싶었던 나만의 꿈...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가만히 쉬는 것’은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일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걸 겪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우린 뭔가를 해야만 한다.

가만히 쉬기만 하고 있지 않는, 꿈 많고 시간 많은 우리가 치료 이후의 생활을 잘 영위하게 위해서는 한 가지 특별한 기술을 연마해야만 한다. 어려운 건 아니다. 그냥 단지 자체 피로 감지 시스템을 가동해 자신을 잘 체크하다가 놓아야 할 때는 놓을 줄 알기. 그것만 잘 하면 된다. 물론 이게 생각보다 힘들어서 문제지만.      


 요양 병원 환자분 중에는 내가 미혼인 것이 안타까우셨는지 처음 인사를 나누며 함께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런 말을 해주신 어머니 한 분이 계신다.      

“여기 병원에 자기처럼 미혼 환우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결혼한다고 청첩장 왔어. 그러니 너무 우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

어디를 가나 꼭 한 분씩 있는, 대표적인 우리네 어머님의 말씀. 그 말을 듣고 더 우울했다. 나를 보는 시선이 불편하시구나 하는 생각에. 그런 시선이 싫어서라도 뭔가 나만의 영역이 필요하다. 그런 시선이 느껴질 때 ‘저 그렇게 안쓰럽게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르시겠지만 저도 제 할 일이 있어서요’ 하며 재빨리 숨을 수 있도록 말이다.      

  

  '가만히 쉬는 것'이 환자를 위한 ( 특히 소속이 없는 미혼 환자에게는 더더욱) 가장 좋은 일은 아니다.  가끔 내가 글이라도 쓰겠다고 이렇게 덤비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이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존감을 지켜줄 유일한 나의 버팀목이라는 걸 확인할 때다.


먹어도 고.’

갑자기, 이 말이 유독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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