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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취향을 갖는다는 것

딩크가 되고나서야 취향을 찾았다

by Jessmin

학창 시절 가장 곤란한 날은 수업 첫날이었다.

미국은 학기 첫날 본인 소개를 간단히 하고 서로를 익힌다. 순서가 오기까지 여러 명의 이름, 취미 등을 듣는 동안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가며 취미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생각했다.




난 여러 가지를 배웠다. 내가 원해서 배운 것도 있고 원하지 않았지만 배운 것도 있다.

간절히 원해서 배운 건 음.. 유학 정도였던 것 같다. 스스로가 무척 원해서 유학을 갔다. 물론 유학이란 걸 제하고 내가 원해서 배운 건 많지 않다.

(부모님은 헛돈 썼다며 이 얘기를 몹시 싫어하신다.)


자의에 의해 배우고자 했던 것들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또한 아니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완성되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방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였다. 방에서 무얼 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닌 그저 책상 밑에서, 옷장 안에서, 이불 안에서 책을 읽고 상상하기만을 즐겼다.


그런 딸의 미래가 풍성하지 못할까 걱정된 엄마는 날 줄곧 밖으로 데려나가려 했다. 그녀가 그리는 풍성한 삶은 멋진 레저를 즐기는 삶이다. 그러다 보니 배우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를 배웠으며 스노보드 같은 경우엔 완벽에 가까운 습득을 했다. 운동신경이 빵점인 내게 그건 엄청난 결과물이었다.


개인과외(?)를 받아가며 터득했고, 그녀는 그 추운 설원에서 나를 혼자 두지 않고 함께하며 응원했다. 그렇게 겨울엔 매주 수차례 스키장을 데려가며 내 스노보드실력을 다졌다.


그렇게 성인이 된 쟈스민은 한 번이라도 스키장에 갔을까?


안 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취향이 아니라서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엔 스키와 스노 보드를 타는 것이 미래를 풍성하게 해 줄 거란 엄마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보니 그곳은 여전히 춥고 고통스러운 곳이다.


여전히 실내, 그중에서도 내 집에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여전히 집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고, 요즘은 그 사색을 바탕으로 이렇게 글을 쓴다.


누군가는 이 삶이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인생을 좀 더 즐겁게 살라며 잔소리한다. 전혀 개의치 않다. 지금만큼 즐겁고 행복한 적 없으니 말이다.

내 인생은 내 취향을 찾았을 때 온전히 행복해졌다.




유학시절 난 명품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명품을 입다 보니 나도 명품가게를 찾았고 그중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내 취향이라 믿으며 구매했다.

그 당시엔 SNS, 주변사람 모두가 명품으로 치장했고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 믿었다.


재밌는 사실은 결혼 후 경제적으로 더 안정이 되고 진짜 취향을 찾으니 드레스룸에 있는 명품은 손도 대지

않는다. 내 진짜 취향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내 취향은 나를 꾸미는 게 아니었다. 집 꾸미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늘 예쁜 집을 갖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집 안에만 있는 사람이니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내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집 안이 문제일 뿐.


그렇게 내 취향의 가구, 오브제, 식기 등을 사며 진짜 취향을 찾고 있다. 한 번씩 인테리어를 바꾸기 위해 카펫을 보러 다니고 조화를 구매하고 쿠션 커버를 바꾸는 것 등을 하며 취향을 찾아간다.




취향과 딩크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없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고, 취업을 하고 각자 본인의 취향을 찾았을 수 있다.

그러나 난 타고나길 걱정이 많고 미래를 걱정하는

타입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내가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더 있다면 또 한 번 취향을 포기한 채 전전긍긍 살아갔을 것이다. 이건 작가 한정의 경우다.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느라 한창때를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를 만나고 딩크를 결정한 후에야 비로소 오늘을 살 수 있게 됐다.


예전이면 절대 구매하지 않았을 실용성이 떨어지지만 내 취향인 물건을 집에 데려왔다. 물질에서 오는 잠깐의 즐거움이 아닌 내 취향을 찾고 전시함에서 오는 은은한 뿌듯함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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