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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딩제스 Dec 09. 2016

새벽 단상. 1

직딩단상 | 즉흥글

직금 시계는 새벽 1시 20분을 지나가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발매된 '김광석, 다시'라는 앨범을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다.

문득 그냥 글이 쓰고 싶어 졌다. 주제를 정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 볼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글을 써보는 것이다. 침대에 앉아서 배게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글을 쓴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는 글 쓰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대학생이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았다. 싸이월드 시절에는 매일매일 그곳에 글을 올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그래 생각해보면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 '뭘 먹고살지'라는 막막한 심정이 들 때쯤인가.. 그때부터 글 쓰는 것을 멈췄다. 취업준비를 위해 영어 공부를 해야 했고 학점을 쌓아야 했고 졸업 논문을 준비해야 했다. 할 게 너무 많았다. 글을 쓸 시간도 없었고 여유 있게 글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아침부터 아니 새벽같이 영어 학원을 다녔고 밤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해야만 했다. 그래야 지 만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취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반을 살고 나는 취업을 했다. 그래 대기업에 했다. 남들 보란 듯이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밤 11시에 퇴근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새벽 1시, 2시를 넘길 때도 있었다. 그래, 남들이 그렇게 원하는, 부모님이 그렇게 원하는 곳에 취업을 했고, 부모님 보기에 자랑스러운 아들, 후배들 보기에 멋진 선배로 살아가야 했기에 그 정도 어려움은 견뎌내야 했다. 동기들도 그렇게 살았다. 선배들도 그렇게 살았다.


힘들었지만 참고 견디면서 1년을 버텼다. 그런데 1년이 고비였다. 정말이지 너무 힘들어서 부모님께 그만두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급구 말렸다.

"야야, 먹고사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니만 힘드나.. 남들도 다 힘들지. 결혼할 때까지만 다녀라. 직업 없으면 요즘 결혼도 못한다."

틀린 말씀이 없었다. 그런데 좀 억울했다. 나는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은데, 참으라고 하는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아들은 머리털이 빠질 것 같은데,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은데, 참으라고만 하시니..

나도 나 스스로를 달래 보려 했다.

'그래 얼마나 힘들게 들어온 회산데 지금 그만두면 너무 억울하지, 더 버텨보자.'




버틸수록 내 신경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여자 친구와 다투기 일상이었고 신경질 내는 일이 많아졌고 일을 하면서도 모니터에 대고 혼자 욕하기 일쑤였다. 성격이 나빠졌다. 더러워졌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술을 먹는 날이 잦아졌고 술 먹고 회사 수면실에서 자는 날도 많았다. 야근과 술, 야근과 회식이 생활의 전부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1년 동안 책 한 권 읽지 못했다. 그렇게 여유 없이 회사 생활을 해야만 했다.

회사 생활이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옆에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그 옆에 있어 줄 수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해 줄 수 없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더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래야지 그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팀장님한테 인정받고, 파트리더에게도 인정받고 아주 열심히 일했다. 유관부서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고객도 일을 잘한다며 고맙다며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 일에 빠져서 살았다. 일을 하는 것은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인정받아서 기쁘기도 했지만 내심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야근은 당연했고 주말에도 일을 했고 해외 출장도 많이 갔다. 한국에 없는 날도 많았고 친구들을 볼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외로워질수록, 주변에 사람이 떠날수록 내게 남은 것은 일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을 통해서만 내가 인정받고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픈 날이 있어도, 쉬는 날에도, 급기야 장염이 걸린 날에도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방에서 노트북을 잡고 일을 했다. 아팠다. 몸도 마음도,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을 더 일했다. 같은 일, 같은 생활이 세 번째쯤 반복될 때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만두려 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것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회사에 그만둔다고 말했다. 파트리더와 상담했고 팀 리더와 상담을 했다. 3달 후에 그만두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팀장이 부탁하는데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되었을 때쯤 팀장이 나를 불러서 따로 이야기했다.

팀을 옮겨 줄 테니 가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여기보다는 일이 편할 것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팀을 옮기기로 했다. 팀을 옮기니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엑셀을 많이 하는 팀이었는데, 나는 숫자에 약한 사람이었다. 숫자를 보는 것도 엑셀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 교통사고라도 나고 싶다. 회사를 안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아파서라도 가기 싫은 회사를 다니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다음 날 6개월 채 일하지 않은 그 팀에서 또 그만둔다고 했다. 나는 관심병사, 아니 관심 사원이었다.


그때 그만뒀어야 했다. 그런데 팀장님이 또 제안을 했다. 다른 팀으로 보내준다고.. 사실 그 팀은 내가 평소에 일해보고 싶었던 팀이었다. 동기들과 술을 먹었다. 어떡해야 하냐고. 동기가 그랬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고 그만두라고, 미련이 남는 게 가장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하다가 못하겠으면 그때 그만둬도 된다고. 한 번 말하는 게 어렵지, 두 번째 그만둔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나는 장기 휴가 2주를 얻고 다시 팀을 옮겨 회사를 다녔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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