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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딩제스 Jan 03. 2018

죽음의 대한 단상

故 샤이니 종현 유서를 읽다가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주말부터 책장에서 꺼내 읽고 있는 ‘상실의 시대’에 한 구절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라는 말은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다. 소설 속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을 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이 또 자살을 한다. 그렇게 주인공 와타나베는 가장 아끼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상실의 시대'를 그리고 있다.


‘삶의 한 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실에 대한 소설을 읽다가 어제 죽음에 관한 뉴스를 접했다. 샤이니 종현의 죽음이었다. 그는 내가 아이돌 가수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가수였다. 뉴스와 SNS는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연신 쏟아냈다. 기사 속 사진에서는 죽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무색할 만큼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죽음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밝은 웃음이었다. 해외 각종 언론에서도 그의 비보를 크게 다뤘다. 그런데 한편 연예인들의 죽음은 그 무게에 비해 너무나 가볍게 다뤄지고 있었다. 


"왜 인기도 많고 돈도 많은 애가 자살을 해?"
"내가 그 정도 위치면 남은 인생 편하게 살겠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지 왜 자기 목숨을 끊어?"


사람들은 허공에 날아가 흩어지는 가루처럼 그의 죽음에 대해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유명인이라 어쩔 수 없지만, 관심 없다면 그렇게 깊은 애도를 표할 필요도 없지만, 가볍게 다루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알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다. 10대~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이 더 많다. '자살공화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 너무나도 무관심하다. 반도체, 가전제품 1위는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면서 자살률 1위라는 타이틀은 모든 정치인과 언론에서 그저 쉬쉬할 뿐이다. 


그런 무관심 속에 한국은 OCE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12년 넘게 하고 있다.

TV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집계에 따르면 매일 고속버스 한 대 탑승객이 전원이 자살을 하고 한 달에 아파트 300세대 주민들 1,000여 명이 자살을 한다. 연간 1.5만 명이 자살을 하고 15만 명 넘게 자살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사고나 4대 질병 같은 것에 대비해서 각종 보험을 들지만 자살에 대해서는 모두가 손을 놓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무관심 속에 우리나라에서는 매 시간 1.5명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우리 곁을 떠난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 자살공화국.


연예인도 이 자살 공화국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특히 연예인은 유명하다는 이유로 겉으로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고 일반인들처럼 맘 놓고 친구를 만날 수도 없다. 특수한 직업으로 인해 사회생활에 있어 매우 소외된 계층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다. 누구에게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본인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을 그들은 가지 못한다. 기본적인 사회안정망도 이들에게 닿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의 외로움은 꺼내 보일 수가 없는 매우 모순적 직업이 바로 연예인이 아닐까.


나는 오늘 종현이 남기고 간 유서를 몇 번이고 되뇌어 읽었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로 시작한 유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상과 부딪히는 건 내 몫이 아니었나 봐. 세상에 알려지는 건 내 삶이 아니었나 봐. 다 그래서 힘든 거더라. 부딪혀서, 알려져서 힘들더라. 왜 그걸 택했을까.’


그는 연예인이라는 신분, 가수라는 직업을 몹시나 버거워했던 것 같다. ‘세상과 부딪혀서 알려져서 힘들다고 지금껏 버티고 있었던 게 용하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문장을 보면서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주말부터 죽음과 관련된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오늘 이 유서를 읽고 나는 하루 종일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키의 글처럼 어쩌면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생명에 내재되어 있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있는 다른 영역이 아니라 삶 속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생명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 향해 치닫고 있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우리는 매일을 살지만 그 하루만큼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아도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죽음은 나이에 정비례하지 않는다. 한 살에도 죽을 수 있고 27살에도 죽을 수 있다. 반면 100세에도 살 수 있고 그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도 있다. 죽음에는 나이가 없다. 노화와 죽음은 완벽히 다른 개념이다.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늙어서 죽을 거라 생각하지만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는 게 사람 목숨이다. 죽음에는 나이가 없고 죽음에는 예고가 없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고 삶의 마지막의 모습은 죽음이다. 이는 모든 생명에게 해당하는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다를 뿐이지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다.


그런데 누구나 죽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자살은 생명에 있어 가장 비극적 결말이자 남은 이로 하여금 크나큰 고통을 준다.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주변 사람들에게 멍에로 남긴다. 가족들에겐 더욱더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남긴다. 특히 유명한 연예인의 죽음은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준다.


하루 내내 죽음을 생각한 날,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음원 차트를 보니 1,2,3위가 모두 종현의 노래였다.
1위는 ‘Lonely’ 2위는 ‘하루의 끝’ 3위는 ‘한숨’ 이 세 곡 모두 종현이 작사 작곡한 노래들이었다.

‘나는 혼자 참는 게 더 익숙해 날 이해해줘’(Lonely),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하루의 끝)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정말 수고했어’ 요 (한숨)

노래를 들어보면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던 것 같다. 마지막 가사들이 한결 같이 ‘수고했다. ‘괜찮다’, ‘고생했다’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다. 혹은 자신을 그렇게 위로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서에도 이렇게 썼다.


무슨 말을 더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수고했다. 고생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의 가사대로 ‘외로움과 괴로움은 기억하나 차이’(Lonely) 였는데 그는 외로움과 괴로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음악활동을 해왔던 그가 가엽게 느껴진다. 나도 뒤늦게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는 꽤나 많은 곡들을 남겼다. 샤이니 곡들을 작사하고 솔로 앨범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을 작사 작곡 또는 공동 작업을 했다. 그는 단지 아이돌이 아니라 실력 있는 음악가였다.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정말 수고했어요

<한숨. 노래 이하이. 작사 종현. 작곡 종현, 위프리키>


우리는 그의 무거운 숨을 헤아릴 수 없었고 한숨의 깊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죽음이 끝내 그를 안았다. 그의 죽음을, 그의 자살을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탓하지도 말았으면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지 말았으면 한다. 얼마나 힘들었지는 모르면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으면서 내뱉는 말들이 듣기 거북하다. 그냥 그의 말대로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라. 그거면 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그의 죽음이 다른 죽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우울한 감정은 전이된다. 특히, 유명인의 죽음은 파급력이 매우 크다.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외로움과 괴로움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힘은 안 나겠지만, 여전히 사는 게 힘들겠지만 삶은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자신이라도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버텨줬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을 테고 더 많이 웃는 날도 있을 테니까.. 천 년 만 년 가는 슬픔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살아줬으면 좋겠다. 당장은 손이 닿지 않고 공기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당신을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조금만 더 힘 내주길 바란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응원의 손길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故 샤이니 종현의 유서 전문>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 끊기는 기억을 붙들고 아무리 정신 차리라고 소리쳐봐도 답은 없었다.

막히는 숨을 틔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멈추는 게 나아.

날 책임질 수 있는 건 누구인지 물었다.

너뿐이야.

난 오롯이 혼자였다.

끝낸다는 말은 쉽다.

끝내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여태껏 살았다.

도망치고 싶은 거라 했다.

맞아.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나에게서.

너에게서.

거기 누구냐고 물었다. 나라고 했다. 또 나라고 했다. 그리고 또 나라 고했다.

왜 자꾸만 기억을 잃냐 했다. 성격 탓이란다. 그렇군요. 결국엔 다 내 탓이군요.

눈치채 주길 바랬지만 아무도 몰랐다. 날 만난 적 없으니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게 당연해.

왜 사느냐 물었다. 그냥. 그냥. 다들 그냥 산단다.

왜 죽으냐 물으면 지쳤다 하겠다.

시달리고 고민했다. 지겨운 통증들을 환희로 바꾸는 법은 배운 적도 없었다.

통증은 통증일 뿐이다.

그러지 말라고 날 다그쳤다.

왜요? 난 왜 내 마음대로 끝도 못 맺게 해요?

왜 아픈지를 찾으라 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난 나 때문에 아프다. 전부 다 내 탓이고 내가 못나서야.

선생님 이 말이 듣고 싶었나요?

아뇨. 난 잘못한 게 없어요.

조근한 목소리로 내 성격을 탓할 때 의사 참 쉽다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아픈지 신기한 노릇이다. 나보다 힘든 사람들도 잘만 살던데. 나보다 약한 사람들도 잘만 살던데. 아닌가 보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고 나보다 약한 사람은 없다.

그래도 살으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수백 번 물어봐도 날 위해서는 아니다. 널 위해서다.

날 위하고 싶었다.

제발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왜 힘든지를 찾으라니. 몇 번이나 얘기해 줬잖아. 왜 내가 힘든지. 그걸로는 이만큼 힘들면 안 되는 거야? 더 구체적인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 거야? 좀 더 사연이 있었으면 하는 거야?

이미 이야기했잖아. 혹시 흘려들은 거 아니야? 이겨낼 수 있는 건 흉터로 남지 않아.

세상과 부딪히는 건 내 몫이 아니었나 봐.

세상에 알려지는 건 내 삶이 아니었나 봐.

다 그래서 힘든 거더라. 부딪혀서, 알려져서 힘들더라. 왜 그걸 택했을까. 웃긴 일이다.

지금껏 버티고 있었던 게 용하지.

무슨 말을 더해.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만하면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해줘.

웃지는 못하더라도 탓하며 보내진 말아줘.

수고했어.

정말 고생했어.

안녕.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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