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역에서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셔 숙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준이는 나보다 일찍 일어나 나비를 만지며 놀고 있었다.
"형 일어났어요?" 부스스하게 일어나는 나를 보고 준이가 말했다.
"어.. 머리가 좀 띵하네."
"해장국 먹으러 갈래요?"
"니 출근은?"
"점심 전까지만 가면 되예"
"그래? 그러면 가자."
우리는 자취방을 나와 근처에 있는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뜨끈뜨끈한 돼지국밥을 먹으니 속이 좀 풀렸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만 부산에 살아서 유명한 부산 음식에 대해 잘 몰랐다. 초등학생이었으니 돼지국밥도 안 먹었고 회도 거의 먹지 않았다. 가끔 어머니가 소고기 국밥을 집에서 해 주셨는데 그건 정말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부산은 초량 우리 동네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부산에 유명한 관광지인 해운대나, 광안리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고 가족들과 갔던 용두산 공원, 초읍 어린이대공원정도가 전부였다. 친숙하지만 낯선 곳, 그곳이 부산이다.
국밥을 얼큰하게 먹고 나와서 준이를 배웅해 주고 나는 행선지를 정해야 했다. 카페를 가고 싶은데 오후에 기차를 타러 부산역으로 가야 했기에 부산역 근처로 가기로 했다. 서면에서 버스를 타고 초량으로 향했다. 부산의 가을은 운치가 있었다. 서울보다 낡은 건물이 많고 도로도 좁아서 레트로 감성이 곳곳에 묻어난다. 버스가 조방 앞(범일동)을 지날 때는 옛날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양화점이 이쯤이었나 하면서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30대 젊은 아버지는 이제 60대가 되었고 나는 그때의 아버지 만큼 나이가 들었다. 내 나이 때 아버지는 가정을 꾸리고 딸, 아들 네 가족을 먹여 살렸는데.. 나는 지금 이룬 것 하나 없이 혼자 회사만 다닌다. 그 회사도 힘들다고 이렇게 홀연단신으로 여행 와서 놀고 있으니 몸만 어른이 된 애 같다. 어른아이. 요즘 뭐 다 어른 아이지. 애기 키우기 전까지는 다 애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버스는 초량에 도착했다. 정발장군 동상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외삼촌이 운영하던 금은방 자리가 나온다.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지만 그 주변에서도 많이 놀았다. 오락실도 가고 자전거 빌려서 타고 놀곤 했다. 조금 올라가니 초량 시장이 나왔다. 이곳은 어머니랑 가장 자주 왔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생선을 사고, 야채를 사고, 내 운동화도 대부분 여기서 샀다. 장을 보면 검은 봉다리(비닐봉지)가 손에 하나둘씩 늘어나곤 했던 기억이 있다.
초량시장 주변을 걷다가 부산역이 마주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아래층에 롯데리아가 있었는데 이 롯데리아에도 추억이 많다. 어머니가 그땐 회사에 다녔는데 월급날 꼭 누나와 나를 이곳에 데려와 햄버거를 사주셨다. 데리버거. 여전히 나는 데리버거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는 왠지 햄버거를 드시지 않았다. 우리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시며 감자튀김 몇 개만 집어드셨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다. 왜 햄버거를 드시지 않았는지.. 아들 딸 사 먹이는 건 하나도 아깝지 않은데 자기한테 돈 쓰는 것에는 늘 인색하셨던 어머니.. 그 시대 어머니들처럼 우리 어머니는 자기 옷 한 벌 사 입는 걸 그렇게나 아까워하셨다. 그게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취업하고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서 옷 사드릴 때 그렇게나 손사래를 치셨다.
"야야 말라꼬 이런 데서 옷 사노..?" 하시면 마치 도망가시려던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하얀색 블라우스를 사드렸었다.
사색에 빠졌다가 책을 읽었다가 하다가 기차 시간이 한 시간쯤 남았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로 부산역 풍경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산역으로 건너가 찰칼 찰칵 소리를 내면서 부산역 광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늦가을 부산역 앞 풍경은 단풍으로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옛날 부산역 광장에는 분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형물만 남아 있었다. 풍경은 바뀌고 기억은 바래진다. 구봉산 끝자라게 있는 동네 사진을 찍고 싶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대합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였다.
왓?!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있을까? 분명 그녀였다. 옆에는 여행 메이트 광우가 있었다. 광우를 보자 더 확신이 갔다. 그녀가 분명하다. 이런 드라마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우연을 겪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둘은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면서 대합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가 바로 앞에 딱 나타났다.
"광우 안녕! 여울 안녕?"
"오~~~~~~"
"어멋~~~~" 둘은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놀라는 표정을 했다. 나도 사실 너무 놀랬지만 이미 나의 놀람은 반가운 마음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아니 형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 광우가 정신을 차리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나 혼자 여행 왔지."
"아 진짜요?"
"응, 근데 둘은 어쩐 일로..?" 내가 물었다.
"아 저희는 부산 여행 관련해서 포스팅하는 게 있어서요. 촬영차 왔다가 이제 올라가는 길이에요."
"아, 그래? 그러면 지금 서울행 기차 타려고 온 거야?"
"아, 네네. 여울이만 기차고 저는 저는 시외버스 예약해서 곧 가야 해요."
"아, 그래? 암튼 진짜 반갑다야. 진짜 신기하네"
"정말 신기하네요" 놀란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가 대답했다.
"형 근데 너무 반가운데 저는 버스 시간이 다 돼서 가야 돼요." 광우가 허둥지둥 말하면서 점점 뒤로 빠졌다.
"어.. 어.. 가 봐."
"여울 갈게." 어지간히 급했는지 광우는 대충 인사를 남기고 바로 광장 쪽으로 내려갔다. 아마 지하철을 타려는 거 같았다.
"어.. 광우. 나중에 연락..." 광우의 뒷모습에 대고 그녀가 인사했다.
그리고 우리는 갑자기 둘만 남게 되었다. 둘만..
그녀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이 처음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나도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곳도 아닌 여기 부산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예고도 없이 둘만 남게 된 것이다. 광우가 있으면 분위기가 좀 수월했을 것 같은데 갑자기 가 버려서 딸랑 둘만 남게 되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반가웠고 침착해지고 싶었지만 심장은 마구 뛰었다.
'..............?'
할 말이 생각이 안 났다.
"커피 한 잔 할래요?"
뜸들이다 내가 먼저 말했다. 어떤 안부나 사전 이야기도 없이.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존댓말을 썼는지, 반말을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로 한 달 전에 이태원에서 봤는데, 그땐 뭐라고 대화했지..? 암튼.
"아.. 아니요. 괜찮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 아.."
예상치 못한 거절에 나는 진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제가 기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아.. 얼마 안 남았구나.."
"아.. 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저 빵 사러 갈 건데.."
'잉.. 빵을 사러 간다고?' 같이 가자는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네.. 그럼 일단 빵집으로 갈까요?"
우리는 역사에 있는 빵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가 밥을 못 먹어서요." 가는 길에 그녀가 말했다.
"기차에서 빵 먹으려구..."
"아.. 밥을 못 먹었구나.." 나는 별 의미 없이 그녀가 한 말은 반복할 뿐이었다.
2층 대합실을 안쪽에 빵집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빵을 고르러 들어갔다. 나도 빵을 사야 하나? 나는 지금 빵 먹고 싶지 않은데.. 나는
빵집 앞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커피 마실 시간은 없으니 뭐라도 사주고 싶은데.. 사줘도 되나? 커피 한 잔 하자는 내 제안을 거절한 거 아닌가? 아, 시간이 없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러면 우유라도 사줄까?
나는 부랴부랴 냉장 쇼케이스에 있는 500ml 우유를 꺼내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녀는 아직 빵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우유만 계산해서 먼저 가게를 나왔다. 밖에서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파란 롱가디건에 주황색 소형 캐리어를 끌고 핑크색 백팩을 메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묶은 갈색 긴 머리였다. 처음 봤을 때는 초록색 브릿지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갈색 머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니 그녀는 영락없는 대학생이었다. 옷도 수수하고 가방도 수수했다. 신발은 캐주얼 구두였는데 편한 운동화 같은 구두였다.
빵을 계산하고 그녀가 가게에서 나왔다.
"몇 시 기차예요?" 내가 물었다.
"음..." 핸드폰으로 표를 확인하고 그녀가 말했다.
"10분 정도 남았네요."
"아.. 그러면 바로 가야겠네요."
"네...."
승강장 쪽으로 가면서 우리는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부산에는 언제 왔어요?"
"아, 그제 왔어요. 부산 여행 관련된 포스팅을 의뢰받았는데요. 광우랑 왔다가 취재하고 오늘 끝나서 올라가요."
"아.. 그랬군요."
"제스는요?"
그녀는 나를 제스로 불렀다. 나의 영어 이름.
"저는 혼자 여행 왔다가 올라가는 길이에요."
"아.. 혼자 여행도 좋아하시는군요."
"네,그렇죠."
혼자보다는 같이 여행하고 싶지만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짧은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승강장 에스컬레이터 근처까지 왔다. 더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여기서 멈추는 게 맞을 거 같았다.
"이거 빵이랑 같이 먹어요."
아까 산 우유를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아... " 그녀는 거절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려는 듯했지만 내가 훅 빠져버렸다.
"커피는 못 마시니 우유라도"
"... 네"
"그럼 잘 올라가요."
"네.."
그렇게 그녀를 보냈다. 짧디 짧은 마주침이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더 반갑게 인사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렇게 그녀는 떠났다. 커피 한 잔 못하고.. 10분도 채 되지 않은 순간에 반가움과 놀람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생에 가장 강렬한 10분이었다.
분명, 그녀를 포기하려 했다. 저번 이태원 만남 이후에 마음을 접으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이 겹쳐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서울도 아니고, 안양도 아니고.. 여기 부산, 나의 고향에서...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샀다. 들뜬 마음은 부풀어서 그 어느 때보다 커졌는데 안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공갈빵 같이, 풍선 처럼 부풀어 있고 안은 텅 비었다.
다시 그녀가 보고 싶었다. 다시 만나면 만나서 커피 한 단 마시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타인에 불과했다. 마음을 접으려는 운명의 장난처럼 이렇게 갑자기 마주치게 된 걸까..? 당신은 운명일까? 이건 그저 우연일까..? KTX 기차는 어두운 터널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나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우연이라도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런 우연도 또 없을 텐데...
당신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우연이든 운명이든
다시 보고 한 번 당신을 보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어야 합니다. 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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