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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직딩제스 Jun 28. 2016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행복의 소개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어릴 때는 참으로 쉽게도 생각했었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있다고..
그런데 커서 생각해보니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가당치 않은 일인지 깨닫고 있다.

행불행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것 만큼 주관적인 것이 또 있으랴.
무엇이 행복인지,
물질적 풍요가 행복인지,
정신적 풍요가 행복인지,
아니면 그 밖의 것인지
사람마다 그 정의가 다르다.

또한 매우 상대적이다.
나의 행복이 남의 행복과 같지 않고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같지 않다.
때로는 남의 행복이 나에겐 상대적 불행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행복은 정의하기 어렵다.
이런 '행복'을 주기 전에 잡을 수는 있을까.

더욱이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잘 모르고 지낸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에 대해
별다른 고민하지 않고 살아간다.
자신도 모르는 ‘행복'을 남에게는 줄 수 있을까.

행복에 대한 정의는 어려우니
그러면 '주다’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보자.
주다. 과연 무엇을 줄까.
니가 원하는 것을 준다?
예로, 니가 차를 원하면 나는 차를 사준다.
니가 화장품을 원하면 화장품을 사주고,
빽을 원하면 빽을 사준다.
그러면 너는 행복해할까..
니가 원하는 모든 걸 다 가져다주면 너는 행복해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좋아하겠지만 이내 받는 것에 익숙해질 테고계속 받기만 하다 보면 받는 것이 관성이 되고
오히려 받지 못할 때, 덜 받게 되었을 때 불행을 느끼고 상대방에게 실망할 것이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너 변했어.”(그럼 넌 안 변했뉘? 다 변한다)

아, 그래~ 변하지 않고 주기만 해보자.
"사랑받는 여자라서 행복해요~”
계속 받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진다고 쳐보자. 원하는 걸 다 받으니 좋고 편할 것이다. 사랑받는다고 느껴지겠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받기만 한다는 것’에는 '주기만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줘야 받지~ 그러면 이 주기만 하는 사람. 이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혹자는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줌으로써’ 분명히 받는 것이 있다. 받는 사람의 미소라 던가, 고맙다는 말이라던가, 주면서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던가, 줌으로써 기대했던 무엇인가를 분명 ‘받는다'.
정확히 1대 1의 등가교환은 아니겠지만 준다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상호 주고받기’를 내재하고 있다.

대게 부모님의 사랑이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조건 없는 사랑도 받는 게 있다. 아기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감이나, 아기의 재롱이라던지, 애 키우면서 돈독해지는 부부관계랄지 심리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부모들도 '받고 있다’.
잠깐 딴 이야기지만, 나중에 자식 크면 물질적으로도 다 돌려받게 되어 있다. 자식만 한 보험이 없다고들 하지 않나. 모든 게 Give & Take인 것이다.

다시 ‘준다'는 의미로 돌아가 보자.
이 ‘준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기의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몫을 할애하여 남에게 주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가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것 참아가며 자기 쉬는 시간, 자는 시간 줄여가며, 일정의 자기 몫을 ‘떼어내어' 상대방에 주는 것이다. 이렇듯 준다는 것은 엄연히 '자기희생’ 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받지 않고 무조건 주기만 하는 것은 '완전 자기희생'이다. 받는 데는 한계가 없지만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희생만 해서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또 누군가의 희생으로부터 받은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받은 만큼, 희생된 만큼 채워져야 상대방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대방은 불행한데, 자신만 행복하면 그것은 과연 행복일까. 이기적 행복이 아닐까.
서로가 행복해야 진정으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행복하게 해줄게’라는 문구를 생각하다, 글이 길어졌는데; 글을 마무리해보자.
(늘 그렇다, 나의 글은 쓰다 보면 길어진다..; )

요약 차원에서 '행복하게 해준다’를 공식으로 나타내 보면 ‘행복 = a '과 ‘주다 = b’로
{a x b = X }와 같은 방정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a와 b는 여태껏 말했던 것처럼 정의와 범위가 주어지지 않은 상대적 미지수다.
즉, 정답이 없는 문제다. 이 답이 없는 행복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줄까. 옛날에는 참으로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 답이 없는 문제보다 더 어렵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너를 과연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제 '잘 모르겠다'이다.
내가 너를 100%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너는 나로 인해 100% 행복할지, 그러면 나는 행복할지 이젠 잘 알 수 없을 것 같다.
100% 확신이 서지 않는다.

최근엔 이런 생각이 든다. 완전하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내가 알고 있는 '행복의 요소’를 나눠주는 게 오히려 좀 더 사실적인 '행복하게 해줄게’가 아닐까 하고.

예로 들어, 잔디밭에 누워 구름을 올려다보는 평화로움 이라던가, 새벽 안갯속 조깅의 시원함이라던가,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장면을 보는 아름다움이나, 이른 아침 수영장의 물속 상쾌함이나, 테라스에 앉아 책과 즐기는 커피의 여유로움이랄까,
여름밤 대청마루에 앉아 모기향 피워 놓고 수박 먹는 추억 돋움이랄까, 침대에서 맥주를 마시면 드라마 한 편 당기는 재미랄까, 새로운 길을 여행하며 발견하는 낯섦과 새로움에 대한 감동. 뭐 그런 사소한 행복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재미를 너도 꼭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행복한 순간을 너에게도 소개해 주고 그 순간을 함께 하는 것이다.
'행복의 소개’. 그래 ‘소개'라고 할 수 있겠다. 행복은 주는 게 아니고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이렇게 접근하면 '행복하게 해준다'는 개념을 쉽게 풀어 쓸 수 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너와 함께 하는 것.’
간단하다.

그러면 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 많아야 너에게 '소개해 줄 행복'도 많아진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즉, 내 행복의 시작이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의 시작이 된다.
너에게 알려주고픈 나의 행복, 그 행복의 순간을 내가 먼저 고민하고 느끼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너에게 나눠 줄 수 있다.

나의 행복. 너의 행복. 함께 하면 더 커질 행복.
이것이 어쩜 '행복하게 해 줄게’라는 말에
가장 가깝고도 현실적인 형태가 아닐까.

#행복의소개 #직딩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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