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여사는 화려한 외모에 능란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이 아파트의 마당발이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늘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인사를 건넨다. 그녀와 마주친 대부분의 아파트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을 끄는 특별한 마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또한 아파트의 입주자 대표이기도 하다. 간혹 아파트에서 무슨 물건을 구입해야 할지, 또 어떤 나무가 아파트의 조경에 좋은 지를 그녀에게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녀는 신기하게도 그러한 질문에도 막힘없이 청산유수로 대답을 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런 인물이다.
한 마디로 아파트의 명물, 박 여사인 것이다. 이런 박 여사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그녀의 자녀들이 또한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아들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유명한 법률사무소의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며느리는 대형 대학병원의 내과 의사로 재직 중이다. 딸은 미국에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인데, 그 딸이 디자인한 옷을 한국의 유명한 배우들이 입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들이 시중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사위는 월가에서 연봉 몇 십억을 받는 증권인이다. 이러한 화려한 배경을 후광처럼 휘감고 다니는 박 여사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고 환대를 받는다.
"여사님의 남편이 옛날에 고위 공무원이었다고 하더라고."
"한때 여사님은 공직사회에서도 마당발로 통했나 봐."
그러나 모든 빛 뒤에는 이에 대비되어 웅크리고 있는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박 여사의 남편, 이 교감님! 그녀의 남편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고위 공무원이 아니었다. 그는 시골 초등학교의 교감으로 정년 퇴임한 사람이다. 그런데 허우대가 어찌나 멀쩡한지, 남편의 큰 키, 온유한 표정, 나직나직하면서도 차분한 말투, 그리고 약간은 권위적인 제스처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녀의 남편을 보면서 청렴 고결한 고위 공무원을 연상하는 것 같았다. 고위 공무원이라는 말은 박 여사가 꾸며낸 거짓말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무엇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무엇이었다'로 단정 지어지는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소문이 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녀의 남편은 고위 공무원으로 알려져 있다.
박 여사 자신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데, 옆에 앉아있는 남편을 바라볼 때면 빵빵한 고무풍선에서 슬며시 김이 새는 것 같은 느낌을 뿌리칠 수가 없다. 누나들이 줄줄이 다섯 명이나 있는 집의 막내 외동아들로 태어난 남편. 귀여움과 보살핌만 받고 자라서 인지, 도무지 진취적인 기상이 하나도 없는 샌님 같은 남편이 박 여사에게는 늘 불만이다. 남편은 알아서 인생을 스스로 헤쳐나간 적이 없다. 남편이 교감 자리에 오르는데에도 그녀의 열정적인 내조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남편도, 시댁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남편의 멀쑥한 허우대에 어울리게 그녀는 또한 남편의 옷차림에도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그래서 남편의 학교 재직 시에 얻은 별명이 알랑 드롱이었다. 남편은 교감 생활을 좀 누리다가 나이 제한에 걸려, 결국 교장도 해보지 못 한채 정년퇴임을 해야만 했다. 그때 박 여사는 땅을 치며 후회를 했다. 좀 더 빨리 발 벗고 나서서 남편을 이끌지 못했던 것이 박 여사의 평생의 아쉬움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그렇게 박 여사 남편의 전성시대는 짧고 가늘게 끝이 났다.
박 여사는 아파트 운영 위원회의 입주자 대표를 맡고 있다 보니, 요즈음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는 마을 공동체의 운영위원으로도 가까운 초등학교에 참여하고 있다. 교장선생님의 따뜻한 환대와 더불어 회의가 끝나면 학교의 급식을 대접받는다. 무공해 야채와 유기농 제품으로 이루어진 학교 급식은 박 여사의 까다로운 식성에도 만족할 만큼 풍성하고 깔끔하다. 푸짐하게 먹은 점심은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박 여사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박 여사는 이제 학교 연계 마을 공동체의 회의 날을 은근히 기다리기까지 하고 있다.
"엄마, 미국에 두 달만 좀 와 계셔 주세요. 두 달 동안 패션쇼 준비로 너무 바쁠 것 같아요."
"아빠는 미국 안 가실 거다. 저번에도 아빠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너의 집에 갔다 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죽는 줄 알았다. 저 영감쟁이 때문에 내가 훨훨 나다니지도 못한다. 만약 나 혼자 간다면, 그러면 너의 아빠 식사는 누가 책임지니?"
"엄마, 이번 패션쇼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엄마가 꼭 오셔서 찬희, 찬유를 봐주셔야 해요."
"그럼 너희 아빠는?"
"엄마, 아빠는 그냥 혼자 두시고 오셔요. 엄마가 평생 아빠 코 앞에 모든 것을 챙겨 주시니, 아빠가 아무것도 못 하시잖아요? 엄마가 아빠를 바보로 만드신 거예요. 여기, 코로나 때문에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요. 이번에는 엄마가 꼭 좀 오셔야 한다니까요."
딸아이는 거의 강요하다시피 자신의 필요를 요구한다.
"아이고, 영 자신이 없다."
박 여사는 전화를 끊고 이런저런 궁리를 해 본다. 남편은 집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다. 집안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남편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사용해도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박 여사는 자기 마음에 꼭 들지 않는 남편이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박 여사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밥 힘으로 산다'는 말을 믿고 있으며, 자신도 또한 먹는 일을 즐기기 때문에, 남편의 끼니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다. 또한 남편은 먹을 수 있도록 다 차려주어야 식사를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런 남편을 혼자 두고 어디를 간다는 것은 박 여사에게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 할 일인 것이다. 내가 없다면, 누가 이 남편에게 하루 세끼 꼬박꼬박 밥을 차려준단 말인가? 그것도 두 달 동안이나? 박 여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요즈음 코로나 때문에 학교 방역 도우미가 필요합니다. 혹시 아파트에서 추천하실 만한 분이 있으시면 좀 부탁드립니다."
매사에 나긋나긋하신 교장선생님은 연신 얼굴에 웃음을 띄시면서, 마을 공동체 운영 위원들에게 고개를 숙이신다.
"크게 어려울 것도 없고, 하루에 2~3시간 정도 학교에 오셔서 방역을 도와주시면 됩니다."
박 여사는 밤잠을 뒤척이며 딸아이의 부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을 하다가, 갑자기 한 생각이 떠 올랐다.
"여보, 요즈음 학교에 방역 도우미가 많이 필요한가 봐요. 당신도 운동삼아 하루에 2~3시간 정도 움직여 보심 어떨까요?"
"내가 뭘 그런 것을 해?"
"아니에요. 운동하신다고 생각하시고 한 번 해 보셔요."
박 여사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승낙을 받았다. 일단 이 아파트의 주변 학교는 신청대상에서 제외된다. 당장 남편에 대한 소문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리적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지역의 학교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박 여사는 적합한 거리에 있는 세 군데의 학교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오늘 합격했다고 문자를 받았어. 내일 면접하러 오래."
세 군데의 학교 중 한 학교에서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잘 됐네요. 그런데 그 학교가 두 사람을 뽑는 것 같더라고요. 가능하면 짧은 시간, 또 점심시간이 낀 시간대로 해달라고 하세요. "
면접을 다녀온 남편은 오래간만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님 '합격'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인지, 약간 들떠 있는 모습이다.
"그 학교 보건 선생님이 나보고 자꾸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으시냐고 묻더라"
"그래서요?"
"열심히 잘하겠다고 했지"
박 여사는 속에서 웃음이 치솟아 올라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허우대 멀쩡한 사람이, 그것도 좋은 옷을 쭉 빼입고 왔으니, 학교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이런 별로 기술을 요하지 않는 단순노동을 귀티 나게 보이는 이 사람이 할 수 있을런지 미심쩍기도 했으리라.
"그래, 시간대는요?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 3시간씩 일하래"
"점심은요? 점심은 준데요?"
"아니"
"아이고, 무슨 시간대를 그렇게 받아 왔어요. 오전 11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 2시간만 일하는 파트가 있던데, 그걸 받아오셔야죠. "
"내가 가니 벌써 50대 아줌마가 와 있더라고. 그 여자분이 그 시간을 담당한다고 하던데."
"그럼 점심은요? 점심은?"
"응?"
"그만둬요. 그만둬. 밥도 못 먹는 일, 그런 일 할 필요도 없어요."
"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그만두라니, 도대체 당신 왜 이래?"
그때 미국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아빠가 성공하셨나요?"
"얘야. 학교에서 밥 먹기는 틀렸다. 밥 먹은 뒤의 시간을 받아 오셨구나"
"엄마, 하나 더 신청하세요. 오전에 시작해서 밥 먹는 방역 도우미로 한 군데 더 알아보셔요. 하루 한 끼만 든든히 드셔도 충분하잖아요. "
남편의 눈은 휘둥그레져 있고, 박 여사는 전화기를 든 채 그런 남편을 어이없이 쳐다보고 있다. 어디선가 "끽"하는 자동차의 급정거하는 브레이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