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Ever land)

by 김해경

미국에 사는 딸이 왔다. 14시간을 날아온 딸과 사위 그리고 두 외손자. 나는 7살, 5살의 어린 두 손자가 밤낮이 뒤바뀐 시차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 3년 전 한국에 왔을 때는 두 손자가 지금보다 더 어려서인지, 2살이었던 작은 아이가 거의 한 달 동안을 한밤중에 깨어나 울거나 부스럭거렸다. 모두 곤히 잘 시간대에 들리는 작은 소리는 잠의 훼방꾼이 될 수가 있어, 아파트의 옆집, 윗집, 아랫집 사람들에게 아주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린 두 손자는 생기가 넘쳐 보인다.

"찬희야, 피곤하지 않아?"

"할머니, 괜찮아요. 비행기 타는 것이 좋아요."

"그래?"

'첫째 손자가 웬 비행기 체질이냐'라는 의문의 눈초리로 딸을 쳐다보자, 딸이 얼른 대답을 한다.

"엄마, 찬희가 오는 내내 만화영화를 봐서 지금 신이 나 있는 거예요."

일순간 웃음이 났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나의 두 딸이 추석이나 설날, 시부모님 댁을 가기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텔레비전을 실컷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시부모님도 거의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켜 놓고 계셨다. 두 딸은 명절 내내 텔레비전에 붙어 앉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송을 보곤 했다.


그런데 둘째 딸(미국)도 집에 텔레비전이 없다. 그러니 손자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이런저런 만화 영화를 마음껏 보아서 지금 신이 난 것이다. 딸의 말에 의하면 비행기를 타고 오는 14시간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니, 손자가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가 눈에 선히 그려졌다.


3년 만에 본 두 손자는 부쩍 자라 있었다. 첫째는 음식 먹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바짝 마른 아이였는데, 이번에 보니 통통해지고 키도 많이 컸다. 둘째는 젖병을 물던 아이였는데, 이제 밥도 잘 먹고, 이목구비도 또렷해져 아주 잘 생겨져 있었다. 화상통화를 통해 얼굴을 대했지만, 이렇게 손을 잡아 볼 수 있고, 안아볼 수 있고, 또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화상통화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 동안 이 아이들을 직접 만져보고 안아볼 수 있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찬희야, 오늘 에버랜드 가는 날이야. 너 3년 전 한국 왔을 때도 여기 온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나니?"

첫째 손자는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깜빡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어제저녁 6시에 도착한 아이들을 오늘 에버랜드로 데리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에버랜드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심상치가 않다. 어제가 5월 5일이고, 오늘은 5월 6일. 어느 정도 다녀갈 사람들은 다녀갔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 끝없이 정체를 빚는 길과 차로 꽉 들어찬 주차장, 매표소 앞에 선 사람들의 기나긴 줄. 오늘 에버랜드의 하루가 순조로워 보이지가 않는다.


줄 서기와 기다림의 연속을 거듭한 끝에 손자들은 어린이 놀이기구를 몇 개 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린이를 위한 놀이기구여서 다른 놀이기구에 비해 경쟁률이 낮다는 것이다. 즉 다른 놀이기구보다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줄이 짧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어린이 놀이기구도 최소한 30분~50분은 기다려야 겨우 몇 분을 탈 수가 있었다. 딸과 사위는 두 손자를 데리고 놀이기구 앞에 같이 줄을 서 있고, 나와 남편은 찾고 찾아서 조금 조용한 곳에 가 앉았다. 온 사방 천지가 사람들의 물결로 넘실댄다. 아이스크림이나 핫도그 등 간식을 파는 가판대 앞에는 기다란 줄을 만들며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 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거의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 겨우 입에 넣을 먹거리를 손에 쥐는 것 같은데, 그 음식물이 그동안 기다리느라고 사용한 에너지를 보충하기에도 미흡한 수준인 것 같았다.


예전에는 아예 음식물 반입 그 자체가 금지였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잘 알지 못 하나 지금은 음식물 반입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군고구마를 굽고, 달걀을 삶고, 과일을 씻어 자르고, 음료수와 과자를 준비하고, 먹을 물을 물통에 채우느라 분주했고, 남편은 김밥집에 가서 여러 종류의 김밥을 사 왔다. 이 정도면 점심은 넉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


"엄마, 누가 놀이기구 타러 가는 사람들이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간대요? 안 돼요. 차라리 차 안에서 거의 먹고 가야 해요. 짐을 완전히 줄여야 한다니까요."

"얘야, 그래도 먹어야 놀 수 있지 않아?"


딸아이의 완강한 주장으로 인해 우리는 차 안에서 꾸역꾸역 김밥을 손자의 입과 우리의 입에 처넣고, 구워온 군고구마도 반이상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 물도 마시고, 달걀도 몇 개 까서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음료수와 과자는 아예 가방에서 빼고, 몇 줄 남은 김밥과 군고구마 몇 조각, 달걀 몇 개와 물병 한 개를 챙겼다. 놀기 위한 비상식량을 챙긴 것이다. 아니 놀기 위한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다. 오직 "Let's enjoy"만으로 무장한 채 "앞으로 향하여 돌진"을 외쳤는데, 막상 현장은 즐거움의 놀이터가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북적대는 시골장터의 분위기였다. 오직 줄 서기 연습과 기다림. 특히나 뜨거운 땡볕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배우게 되는 인내의 고달픔. 또한 놀이기구를 즐기는데 드는 어마어마란 대가 지불, 즉 내가 보기에는 너무 비싼 입장료(6인이 입장하는데 256,000. 그것도 여러 카드를 사용해서 할인을 받은 결과이다)와 기다림의 시간낭비와 엄청난 에너지 소모. 이를 통해 나는 이 Everland(영원히 있는 땅)에서 즐기려면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또 인내가 필요하며,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딸이 에버랜드를 즐기기 위해서는 가벼운 차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병 한 개정도만 손에 들고 다녔다. 그런데 영원히 있는 땅! 천국에서 즐길 수 있는 삶이 되기 위해서도, 즉 입장하기 위해서도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려야 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짐을 벗어버려야 그 땅에서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에버랜드의 놀이기구 몇 개를 타기 위해, 그 순간적인 즐거움을 위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듯이,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기도하며 인내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지상의 에버랜드와 비교해볼 때 다행인 것은 천상의 에버랜드는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한 곳에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살펴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어느 한 사람도 기분 상해 있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싱글벙글이다. 에버랜드에 입장한 것,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비록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에버랜드, 영원히 있는 땅, 천국에 입장하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즐거워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싱글벙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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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3시간 10분을 기다려 사파리 체험을 하나 했다. 3년 전에 왔을 때도 한 체험이지만, 어린 손자들에게 호랑이, 사자, 곰을 보여줄 수가 있어 기뻤다. 나오는 길에 50분을 기다려 리프트를 탔다. 그리고 구내식당에서 기꺼이 비싼 비용을 치르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 어스름이 지는 7시 30분 정도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에버랜드에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 누가 영원히 있는 땅의 즐거움을 거부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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