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정체성

by 김해경

미국에 사는 손자가 태권도를 열심히 배운다. 한국 나이로 이제 7살. 나는 손자를 통해 태권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또 태권도에 얼마나 많은 띠 색깔이 있는지도 점점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무슨 색깔이야?"

"보라색"

"와~ 대단하다. 장하구나, 우리 찬희!"

보라색이 어떤 단계인지를 나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당연히 초급 단계인 것은 안다. 그러나 그 밑에 몇 단계가 있는지,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검정띠를 따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날 때마다 띠 색깔이 바뀌었다고 나에게 말하면서, 손자는 아주 우쭐해하고, 남편과 나는 손자의 열렬한 응원군이 되어 마구마구 손자를 칭찬해 주면서 함께 기뻐한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외할머니로서의 나는 간혹 오버액션을 함으로, 손자에게 '나는 너의 편이라는 것'을 확실히 심어주고 싶어 한다.


오늘 뉴욕의 City Field에서 유치원생에서부터 중학생까지 함께 하는, 경기 전 태권도 시범이 있다고 딸이 문자를 보내왔다. 한국시간으로는 5월 1일 오전 7시이고, 미국 시간으로는 4월 30일 오후 6시이다. 나에게 토요일 오전 7시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실시간 방영을 놓쳤더니만, 딸이 다시 녹화영상을 보내준다. 미국의 거대한 땅덩어리의 한쪽 귀퉁이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한국의 전통 무예인 태권도를 다른 민족 앞에서 시범을 보인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일 저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외모는 한국인이지만 보고 듣는 모든 문화가 미국 문화인 저들은 자라나면서 정체성의 갈등을 겪지는 않을까? 외모로 인한 인종적인 피해는 없을까? 저들은 한국의 혈통을 자랑스러워하면서 한국인 배우자를 만나 그 한국의 혈통을 보존하려고 할까?' 하는 별의별 생각들이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찬희, 한글학교 열심히 다니고 있니?"

"네, 엄마. 이제 한글을 좀 쓰고 읽을 줄 알아요."

"그래, 다행이다. 꼭 한글을 가르쳐야 한다."


나는 수시로 딸에게 손자의 한글교육을 닦달한다. 솔직히 나는 나의 손자들이 한국인으로서 당당히 미국 땅에 살기를 원하지 미국인이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 즉 정체성을 잃지 않기를 원한다. 지인 중 한 사람의 딸도 미국 땅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집의 손자들이 학교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글 사용이 뜸해지고, 전화통화에서도 점점 영어로 말하는 것을 더 편해한다면서 나에게 그녀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러다가 손자가 성인이 되면 대화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것이 그녀의 걱정이다. 그녀는 대화 단절을 두려워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들의 정체성 상실을 걱정했다. 언어가 그 사람의 사고와 세계관을 지배한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굳이 들춰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나라의 언어를 간직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간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일제 치하의 우리 선조들은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한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외국 땅에 사는 2세들이 한글을 재미있게 배운다면야 그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때로는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 호주에 사는 딸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한 청년은 자신이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왜 자신의 엄마는 어릴 적 한국어를 강요하다시피 가르쳤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그 청년은 한국어를 말함으로써 자신이 한국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청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청년에게 한글을 알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덧씌우는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다.


어려운 시절, 즉 IMF 사태를 겪으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낸 방법들 중의 하나가 우리 민족이라는 거대 공동체를 인식하게 만들고, 함께 힘을 모으도록 독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IMF 금 모으기 운동)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서인지 나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우리 민족이라는 정체성 개념이 강하다. 비록 외국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 민족인 2세들은 당연히 한글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나의 딸들은 아직까지는 나의 생각에 동조를 하고 있다. 어린 손자들도 아직까지는 순순히 부모의 생각을 잘 따라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좀 더 자라고 자기 생각의 틀을 가지게 된다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5월에 미국의 딸이 손자 두 명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한다. 손자들에게 한국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이런 추억을 바탕으로 한국에 대한 개념을 형성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경복궁, 창경궁 등 한국적인 것과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에버랜드의 오락적인 즐거움을 모두 주기 원한다. 그러나 단 두 주간의 짧은 방문이라, 그들이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할 분들도 많기 때문에, 그다지 시간적인 여유가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오래간만에 한국에 오는 그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내어야 할까? 어떤 시간들이 두 아이의 한국에 대한 사고 형성에 더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를 나는 오늘도 이리저리 생각해 본다.

( 키가 가장 작고 머리를 짧게 깎은, 화면 가장 앞쪽의 중간에 있는 아이가 저의 외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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