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너무 예쁘다. 그지? 그지?"
"싫어, 싫어, 엄마. 나 동생 필요 없어."
"엄마, 동생 3명만 더 낳으세요."
이 무슨 대화인가 하면 호주에 사는 딸이 첫째 아이로 딸을 낳았다. 미국에 사는 동생이 카톡방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너무 예쁘다'라고 감탄을 하니, 곁에 있던 둘째 아들(5세)은 동생이 필요 없다고 외치고, 첫째 아들(7세)은 그동안 동생에게 당한 것이 있는지 동생을 3명 더 낳아라고 엄마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둘째 딸이 먼저 결혼했다.)
그다음 날, 미국의 둘째 손자는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동안 하지 않던 손가락을 빠는 아기 짓을 하면서 '엄마, 나 아기야'라고 해서 모든 가족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오래전, 미국의 첫째 손자도 동생이 태어났을 때 '찬희야, 동생 좋아?'라고 물으니,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어, 나를 놀라게 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미국의 첫째 손자는 자랄 때 너무 수더분하게 커서, 동생에게 이런 감정을 나타내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빼앗긴다고 생각해서인지, 동생에 대한 아이의 반응이 흥미롭다.
8월 8일. 중국에서는 이 숫자를 선호해서 태어나려는 아기는 억지로 억제시키고, 아직 며칠 있어야 태어날 아기는 수술을 해서라도 아기를 끄집어낸다는 이 날에 호주의 첫째 딸이 첫아기를 출산했다. 아기가 태어나서 자랄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이들 부부는 아파트에 살다가 단독주택으로 이사까지 했다. 그리고 사위는 아예 직장에 몇 주 휴가까지 내고 아기를 보살피고 있다. (산후조리를 해 주시는 분이 오심에도 불구하고, 사위가 큰 일을 담당하고 있다.)
"얘야, 밤에 아기가 잘 자니?"
"몰라. 잘 자겠지. 나는 젖만 주고 있고, 밤에는 박서방이 돌보고 있어."
친정엄마인 나는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날 동안, 한 번도 산후조리를 해 주지 못했다. 학교에 있는 탓에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하고, 꼭 친정엄마의 의무를 감당하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이번에도 여러 가지 일이 겹치는 바람에 결국 비행기표를 환불하는 일이 발생했다.
"엄마, 엄마는 손자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지 못해 너무 안타까워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이 너무 예쁘요. "
미국의 둘째 딸이 통화하면서 간혹 하는 말이다. (둘째 딸은 두 아들을 키우면서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내 한다는 소리는 '아이들이 너무 예쁘요, 너무 귀여워요'이다. 나는 지금도 양가 집안 어른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친척 한 명 없는 낯선 땅, 미국에서 두 아들을 늠름하게 키워낸 둘째 딸이 신기하고도 대견하다.)
간혹 외국의 기사를 대하다 보면 아주 번듯한 직장, 즉 트럼프 대통령 시절, 백악관의 대변인으로 있다가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는 사람의 기사를 읽고 좀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시간을 부부가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너무나 소중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두 딸을 양육할 때에는 거의 엄마가 전적으로 육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요즈음 젊은 세대는 좀 바뀐 것 같다) 지금같이 종이기저귀가 흔한 시대도 아니어서 그 천기저귀를 삶아 빨고, 널고 해서 아이를 키웠다. 또 지금같이 산후조리원이라는 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의 돌아가신 친정엄마는 늘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그래서 산후조리는 꿈도 꾸지 못 하셨다. 첫째 딸은 시어머니가 두 주 돌봐 주셨고, 둘째 딸은 동네의 할머니 한 분이 도와주셨다. 나의 철없는 남편은 내가 산후조리를 잘해야 병이 없다고 말하면서 몸을 좀 사리면 '옛날 사람들은 두 주만 지나면 밭일 다 했다'라는 고시대적 발언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남편에 대해 속상할 때마다, 내가 단골로 끄집어내는 말이 이 말이다.
"엄마, 내가 돌일 때 어떤 물건을 집었어?"
"돌, 안 했는데"
"엄마, 내가 클 때 무엇을 잘 먹었어?"
"몰라. 모르겠는데."
둘째 딸은 자신의 두 아들을 키우면서, 어릴 적 본인의 모습이 궁금했나 보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할 때마다 매번 나의 대답은 '몰라, 모르겠는데.' 혹은 '음,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혹은 '키운다고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 생각해볼 틈이 없었어.'로 대답하다 보니, 처음에는 둘째 딸이 좀 서운해하더니만, 그다음에는 점점 질문이 줄어들고, 그리고 마침내 질문하기를 그쳤다.
나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 급급해서, 두 아이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둘째 딸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인지 두 아들의 어린 시절을 사진으로, 비디오로 잘 기록해 놓고, 또 두 아들을 데리고 틈만 나면 여기저기를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다. (남편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두 딸을 데리고 밖으로 돌아다닌 일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이처럼 나는 참 부실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도 아빠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미숙한 아빠였고, 나도 세상 물정에 밝은 엄마가 아니어서 육아정보를(그 당시에는 인터넷 발달이 없어서 육아정보라면 사람들을 만나서 알게 되는 정보들) 공유할 사람들과의 만남도 없었다. 일 머리나 일 요령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그저 닥치는 대로 일처리를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딸이 잘 커준 것이 몹시 고맙고 감사하다. 그리고 이렇게 키워주신 하나님이 또한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도 첫째 딸은 인터넷 정보를 찾고, 육아 선배인 둘째 딸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첫 선물로 받은 아이에게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그런 딸들이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인다. 또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참 좋은 시대이다.
육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 하는 이 부족한 친정엄마는 부디 자라나는 후손들이 두 딸보다 더 훌륭한 후대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바랄 뿐이다.
첫 딸이 아이를 출산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나는 둘째 딸의 말대로 인생의 소중한 부분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주는 그 성장의 기쁨을 나는 맛보지 못했다. 손자들이 가까이 있지 않아 그들을 통한 기쁨도 온전치 못 했고 간헐적이었다. 호주의 딸이 둘째를 낳는다면 그때에는 꼭 가서 친정엄마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리라.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을 현장에서 누려보리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