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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Feb 24. 2023

나도 알지 못한 내 생일!

이불속에서 딩굴딩굴하고 있는데 영상통화 벨이 울린다. 두 딸과의 통화이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미국에서 작은 딸이 말한다. 연이어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작은 딸의 두 손자가 영상 속에서 어른같이 축하 인사를 한다. (이 두 손자는 자기 엄마의 훈련을 잘 받은 아이들이다.)

"아이고, 고마워라! 그런데 오늘이 내 생일이야?"

나는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달력을 본다.

'어, 정말이네!'

옆에 있는 남편에게 나의 시선이 먼저 간다.

내 시선 속에는 '당신, 뭐야? 내 생일도 안 챙기고?'란 원망의 감정이 담긴 시선이다.(그런데 나는 크게 남편의 망각을 개의치 않는다.)

옆에 있던 남편은 엉거주춤하더니만 

"맞아, 오늘 엄마 생일이야! 다들 전화 잘했다!"


둘째 딸은 '엄마, 이 가방 어때? 엄마, 이 옷 어때?' 하면서 영상 속에서 이것, 저것을 보여준다. 

"그래, 고마워!"

"엄마, 이거 한국으로 부칠게요."

"아이고, 부치는 값이 더 들겠다."

"괜찮아요, 엄마!"

손자들은 옆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신들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첫째 딸은 일찌감치 생일 용돈을 보내서인지 별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사실조차도 잊어먹고 있었다.)

"아빠, 오늘 엄마와 맛있는 것 드세요!"

두 딸의 말에 남편은 "그래야지! "한다.


남편은 통화가 끝나고, '어, 치과예약 시간이네!' 하고 외투를 걸치고 뛰어나가더니만, 다시 들어온다.

"왜 다시 들어왔어요?"

"당신이랑 밥 먹어야지."

웃음이 나온다. 나를 생각하기보다, 딸들이 나중에 전화해서 '아빠, 맛있는 것 드셨나요?'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슬그머니 든다.


"야~ 너희들 왜 헤어졌니?"

"얘가 내 생일을 안 챙겨 줬어요. 내게 관심이 없는 거죠."

중학교 커플인데, 이 말을 듣고 있는 남학생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저 학원 가고, 운동 가고, 할머니 생신이라서 가고, 이번 주에 정말 정신없었다고요. 그래서 깜박한 걸 가지고"

나는 속으로는 남학생 편이다. '그래, 잊어먹을 수도 있지. 뭘 그것 가지고 관심이 있니, 없니 하니? 그렇게 사람 피곤하게 하려면 헤어져라. 그게 낫겠다.'

이게 나의 솔직한 생각인데, 아이들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야, 너 잘못했네. 왜 중요한 생일을 안 챙겨? 네가 많이 사과해야겠다"

여학생은 '내가 맞지?' 하는 얼굴로 의기양양하다.


나는 요즘 세대에 있었더라면 열백번 더 내침을 당할 사람이다. 기념일에 대한 감각이 너무 없다. 하물며 자기 생일도 잊어 먹으니까 말이다. 


언니는 아들 둘에 각각 3명의 손주들이 있어서 두 가정을 합하여 총 10명, 그리고 본인과 남편을 합하면 12번의 생일이 1년의 달력에 벌겋게 동그라미 쳐져 있다.

"매달 생일 챙겨야 한다. 매달 1건씩 있다. 매달 파티한다."

"좋네, 언니야. 1년이 휘딱 지나가겠다. 매달 파티하는 인생, 좋지 않아?"

"나이 70에 70km로 가는데, 더 빨리 가서 어지럽다."


내 생일도 못 챙기는 나는 우리 식구 모두의 생일도 못 챙긴다. 이를 안 시댁에서는 한동안 남편의 생일이 있는 달에 일찌감치 문자를 보낸다.

"0 날, 걔 생일이다."

"네! 알겠습니다."

'아니 내 생일 때도 문자 주시지, 왜 남편 생일 때만 문자를 미리 주실까?' 고까운 생각이 들지만, 생일 후 꼭 전화를 하셔서 "미역국은 먹었니?" 물어보시는 시어머니 때문에 남편의 생일상을 차린다.(시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이제 제일 큰 형님이 그 역할을 하신다.)

첫째 딸은 그래도 좀 무덤덤하다.

"아이고, 00야, 어제 너 생일이었네. 미안, 엄마가 깜빡했구나!"

어릴 때 첫째 딸은 좀 울상을 짓더니만, 크고 나서는 방방이 방을 붙인다.

"0월 0일은 나의 생일입니다!!"


둘째 딸은 아주 민감하다. 생일을 잊어버리면 울고불고하는 후유증이 한 주간 지속되기 때문에 바짝 신경을 쓴다.

"여보, 둘째 생일이 되기 전에 빨리 내게 말해줘요!" 나는 일찌감치 남편에게 부탁해 둔다.(그런데 남편도 잘 잊어먹는다. 우리 부부는 부창부수이다.)


기념일에 민감한 둘째가 항상 가족들과 통화하면서 오늘이 무슨 기념일이라고 말해주기 때문에 나는"아, 오늘이구나!"를 되풀이한다. 나는 그날에야 내 결혼기념일을 알게 되고, 그날에야 내 생일을 알게 되고, 미안하지만 그날에야 손주들 생일과 사위들 생일, 딸들 생일을 알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기념일에 민감하지 못할까? 그런데 솔직히 '너의 생일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생각이 내 마음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 같다. '너무 바쁜 세상,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언제 생일 하나, 하나를 챙기고 있냐'는 마음과 '야! 너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귀하고 귀해! 그런데 너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생일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 아니야? 너를 지금껏 키워 주신 부모님이 생일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야?' 하는 마음과 또 "태어난 것 중요하지! 그런데 태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잘 사는 거야. 오히려 남은 인생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생일 아니야? 촛불 켜고 생일축하 노래 부르고, 촛불 끄고  케이크 나눠 먹는 게 생일이야?' 하는 마음도 있다.


어쨌거나 오늘 남편과 점심을 먹으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또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한다. 앞으로 좀 시간적 여유도 있을 것 같으니, 나도 언니처럼 달력에 벌겋게 기념일을 표시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기념일! 잘 챙기면 삶의 활력소가 될 것도 같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활력을 얻기 위해서 투자도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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