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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Jan 13. 2024

공소시효 만료(2/2회)

(단편소설)

 지평선 이쪽에서 끊임없이 나를 바라만 보는 영혼인 아내는 요즘 새 아파트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아파트 뒤, 울창한 산의 남겨진 발톱을 사람들은 다듬고 색칠하여 ‘공원’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 이곳에서, 아내는 시간을 보내기 좋아한다. 수백 년 동안 뛰놀던 놀이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 것에 놀란 단비들이 때로는 나무 위아래를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여 더욱 아내의 눈길을 잡아끈다. 아직도 산이기를 고집하나 옛날의 풋풋한 힘을 점점 잃어가면서도, 봄에는 샛노란 개나리로 소망을 노래하고, 여름이면 지나온 세월의 울창한 나무숲으로 더위를 가려주며, 지금 가을에는 산의 선물인 밤과 도토리를 곳곳에 숨겨놓고, 아파트 주민들을 보물찾기 놀이에 초대하고 있는 이곳!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에도 자신에게 행한 인간의 모든 허물을 잊어버린 듯, 인간을 품기 원하는 그 넉넉한 마음에 아내는 이곳을 더욱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가올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리운 채, 자동차, 오토바이, 아이들의 모든 소리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자신의 외로움을 하얀 가루로 승화시켜 날려버리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에 아내는 벌써 설레고 있다.


  퇴직 후, 나의 팔짱을 끼고 한 주간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기 좋아하는 아내가 오늘 편지 한 장을 내민다.

   "여보, 전에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은 고향친구 있잖아요. 나보고 함께 장례식장에 같이 가자고 한, 그분이 이 아파트에 사시더라고요. 아! 맞다. 이 아파트단지가 원래 그분의 남편이 산 산인데, 아파트로 개발되었다고 했죠. 미분양이 많아서 당신에게 여기로 이사 오면 좋겠다고 해서 우리가 왔죠. 나도 요즘 깜박깜박하네요. 그래도 그분이 여기 사실 줄은 몰랐어요. 지난주 공원의 황톳길에서 만났어요. 아참! 당신 새로 생긴 황톳길 모르죠? 어떤 남자분이 그 황톳길을 만들었어요. 다리를 약간 저시는데, 이야기해 보니 교장선생님이셨더라고요. 그리고 시인이시기도 하고. 내가 미술선생이었잖아요. 예술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서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분도 고향이 안동이라고 해요! 당신, 다음에 같이 한번 만나요. 아니, 당신 안색이 왜 갑자기 창백해졌나요? 어디 속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고요? 정말이에요? 사람 놀라게 왜 그래요? 교장선생님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이북사람이어서 북한 땅이 좀 보이는 이곳으로, 또 미분양으로 입주 혜택이 좀 많기도 해서 이사를 왔데요. 나는 처음에 당신이 이곳으로 오자고 했을 때, 전쟁 나면 제일 먼저 죽을 수 있는 곳이라고 반대했잖아요. 의외로 이곳을 찾는 사람도 있는가 봐요. 왜 혼자 다니시냐고 물으니, 그분의 아내는 지금 허리디스크로 거의 침대에 누워서 지낸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전시간에 잠시 황톳길을 걷다가 가신다고 해요. 그분 말씀이 ‘아스팔트로 화장한 땅들이 얼마나 갑갑해하겠느냐’고, 이 맨살을 드러내고 누워있는 땅에서 편안한 기운이 올라와, 그래서 황톳길이 좋은 거라고 하네요.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아요. 그 교장선생님이 황톳길을 매일 쓸고 닦고 해서, 땅이 반들반들해요. 그렇게 땅도 세수를 해야 하고, 사람의 마음도 날마다 씻고 닦아야 한다나요. 시인이어서 그런지 좀 감성적인 것 같아요. 당신 오늘 정말 힘이 없어 보여요.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죠? 요즘 그 황톳길에 사람들이 제법 와요. 아참! 당신의 고향 친구분, 경희라고 했나요? 경희 씨도 지난주에 처음으로 황톳길에 나와 봤데요. 나는 보자마자 장례식장의 그분이라고 알아봤는데, 경희 씨는 나를 잘 모르더라고요. 내가 당신 이름을 대니, 그때에야 아주 반가워하더라고요. 남편의 장례식 후, 첫째 딸이 사는 호주로, 둘째 딸이 사는 미국으로 가서 살다가, 거의 일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고 하네요. 어제는 가자고 해서 경희 씨의 집에 같이 갔었어요. 책장에 팸플릿이 많이 꽂혔기에 보니, 사진작가시더라고요! 왜 당신은 경희 씨에 대해 내게 거의 말을 하지 않았죠? 아주 상냥하시고 좋으신 분이었어요. 남편은 땅 부자인 부동산 중개인이었다고 하네요. 일명 안동에서는 부동산업계의 왕자로 알려졌다고 하던데요? 본인의 아버지가 땅 거래를 하시다가 알게 된 사람인데,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결혼을 추진하셨다고 하네요. 경희 씨도 학교의 도덕선생님이셨더라고요. 당신과 나의 나이차이보다 한 살 많은 6년 선배였어요. 자신은 아버지의 빽으로 안동시내의 사립학교에 근무했데요. 남편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던 절대 간섭하지 않았다고 해요. 한때 사진에 미쳐, 해돋이를 찍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동해안 바닷가에서 지내도 '왜 아이들을 돌보지 않느냐, 집안 살림은 어떻게 할 거냐'등으로 잔소리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때는 친정엄마가 살아계셔서 모든 일들을 건사하셨기 때문에 그런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쉬더군요. 아, 참! 남편은 양반태생인 안동 권 씨라고 하네요. 이 말을 하면서 웃으시는데 왜 웃는지는 모르겠어요. 남편과의 관계는 무덤덤했는데, 간혹 악착같은 남편의 성격이 무서웠데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하네요. 어느 날, 수업 후 잠시 쉬고 있는 시간에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데요.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이러했다고 하네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재개발된다는 소문이 자자할 때, 남편이 그 집을 방문했데요. 정말 후한 값에 이 집을 매입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남편을 구슬려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갔데요.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약간 지적 장애가 있었다는 거예요. 밭일을 하고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계약서를 보고 나서 또 한 번 깜짝 놀랐데요. 시세보다 너무 형편없는 값에 계약이 되어 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에게 이 계약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면서 전혀 먹히지가 않더래요. 그런데 남편이 "내 아내는 무슨 학교의 도덕선생인데, 내가 그런 허튼 계약을 할 사람으로 보여요? 아주 합리적인 가격이란 말이요."라고 말했다는 거죠. 다른 방도가 없어 자기를 찾아왔다고 하더래요. 그 집이 자신들의 유일한 재산이고, 그 집을 보상받아 커가는 자식들 공부도 시켜야 한다고, 눈물을 글썽거리더래요. 남편의 이런 악착스러움과 비열함이 싫었데요. 아내를 팔면서까지 사업을 해야만 하는지, 또 사람을 억울하게 하면서까지 그 일을 해야 하는지 화가 났대요. 며칠간 남편을 어르고 달래 겨우 계약해지를 했다고 하네요. 남편은 남의 사정 다 봐주고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느냐고 짜증을 냈지만, 어쨌든 한 발 물러서게 해서 다행이었다고 하네요. 경희 씨 아버지도 많은 땅을 가지고 계셨는데요. 임하댐으로 보상은 받으셨지만, 본인의 모든 땅이 사라진다는 것을 아시고 그때부터 기운이 빠지시더니,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데요. 경희 씨는 '아버지는 소작인을 거느리고 소작료를 받으면서 양반행세를 하셔야 하는데, 그것을 못 하게 되셔서 병이 나신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데요. 아버지의 토지 보상금은 첫째 딸의 유학비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친정엄마마저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나야 할 기한이 되자, 남편은 뜬금없이 이 경기도의 파주, 북한의 땅이 저만치 보이는 이곳에 산을 사더니만, 이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나요. 그 후, 남편은 토지 보상받은 돈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땅을 사느라, 집에 붙어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데요. 그런데 갑자기 목포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 시신을 옮겨 부랴부랴 장례식을 치르느라, 사람들에게 잘 알리지도 못했다고 하네요. 또 솔직히 객사한 것이어서 양반체면에 알리기가 좀 부끄러웠데요. 그 당시 당신이 많이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했어요. 당신은 경희 씨에게 마니토 같은 사람이라나요. 마니토! 큭. 학창 시절에 하던 놀이인데, 어른도 마니토가 있나요? 당신은 경희 씨의 마니토이고, 그럼 나의 마니토는 누구인가요? 큭. 농담이에요. 경희 씨의 사진과 그 시인이라는 교장선생님의 시, 그리고 나의 아마추어 그림으로 이 공원에서 작품전을 열면 어떨까요? 당신 왜 놀라세요? 왜 펄쩍 뛰세요? 단지 저의 생각이에요. 시인교장선생님은 오전에, 경희 씨는 오후에 주로 나와서 아직 만난 적도 없어요. 경희 씨는 오전에는 책을 읽는데요. 지금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고 있는데, 어린 왕자에게 자신의 잃어버린 여우에 대해 위로를 받고 싶데요. 길들여진 여우가 떠나버린 너무 먼 그날들이 아직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다고 해요. 아이, 참! 전시회는 저의 상상이라니까요! 뭐라고요? ‘오지랖 넓은 짓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요?’ 왜 화를 내세요? 왜 고함을 질러대는지 모르겠네요. 알겠어요. 한번 상상해 본 것뿐인데, 당신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당신이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 싫다고 하니. 알겠어요, 그럼 지금 한 이 모든 말, 취소할게요. 그런데 경희 씨의 눈이 사진 때문에 혹사를 해서인지, 요즘 점점 나빠지고 있데요. 마침 우편물 함에 경희 씨의 남편이름으로 온 편지 한 통이 있어서, 경희 씨가 가지고 올라갔죠. 경희 씨가 '죽은 남편에게로 편지가 다 오네' 하더니만 나보고 좀 읽어달라는 거예요. 아마 좀 무서웠나 봐요. 또 눈도 잘 보이지 않고요. 그런데 내용이 이상했어요. 경희 씨에게는 대충 읽어줬어요. 내가 이 편지를 전직형사인 당신에게 좀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경희 씨를 설득했어요. 당신에게 보여준다니까, 기꺼이 ‘오케이’라고 하더군요. 당신 한번 읽어보세요. 


 도련님! 소식이 없는지 벌써 일 년이 되어갑니다. 이 무지렁이는 잘 지내고 있습죠. 저는 도련님이 정말 걱정됩니다. 저번에 술이 잔뜩 취하셔서 저를 붙잡고 우셨잖아요. 마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도련님을 제가 업어서 키우다시피 했죠. 도련님은 잘 모르시지만 저는 도련님이 항상 눈에 밟혀요. 도련님은 농협장 따님과 결혼하려고 무척 애를 섰었죠. 그 때 제가 별 힘이 되지 못해 안타까웠어요.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한다고, 도련님은 일찌감치 부동산에 뛰어들었죠. 저는 그 넓은 땅이 다 도련님의 것인 줄 알았어요. 드디어 도련님이 가문을 일으킨 거라고 좋아했죠. 그런데 그 땅이 다 이북내기 부부의 땅이라고요? 그 부부가 이름을 감추고 싶어서 도련님이 이름을 대신 빌려줬다고요? 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땅을 산다고 해서 도련님도 의아했다고 하셨죠? 도련님, 그때는 아무 말씀 안 드렸지만, 아마 큰 아들 때문일 거예요. 도련님도 아시잖아요? 지금 도련님의 자리, 그 사위자리를, 이북내기 부부는 아들이 땅 때문에 차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땅 매입자로 도련님을 선택한 것도 당신이 아니라 내 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도련님에게 은근히 주장하고 싶었지 않았을까요? 부모로서 도련님께 대한 항거죠. 그런데 그 부부가 죽었어요. 부부의 땅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요. 토지보상이 이루어지기 몇 달 전부터, 도련님은 아주 초조해했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저녁, 내일 서울 갈 그 부부의 차를 좀 봐달라고 도련님이 차를 끌고 오셨죠. 그 부부가 너무 바빠서 도련님께 부탁했다면서요. 그리고 그 차의 브레이크를 조금만 느슨하게 풀어달라고 우리 아들놈 기철이에게 말했죠. 기철이는 지금의 상태가 괜찮다고 했는데도, 도련님은 그 부부가 부탁한 거라고, 꼭 좀 풀어달라고 해서, 기철이도 마지못해 나사를 좀 풀어줬었죠. 그다음 날 교통사고가 났잖아요. 물론 안개 때문일 수도 있는데, 기철이도 이 무지렁이도 엄청 놀랐어요. 일순간 몸이 와들와들 떨렸어요. 그때 도련님이 오셔서 '모든 일이 다 괜찮아.'라고 하셨죠. 어쨌든 도련님은 기철이의 카센터를 오픈하는데 많이 도와주셨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또 영감이 나를 키운다고 고생했으니 매달 백만 원씩 보내주겠다고 하셨죠? 네, 지금까지 잘 받았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요즘 문제가 좀 생겼어요. 기철이의 심장이 좋지 않다고, 대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이고, 어쩝니까? 손 벌릴 데는 도련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일 년 이상을 매달 보내던 돈도 보내지 않으셔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저는 정말 궁금해요. 진작 편지를 드리려다가 참고, 참았어요. 그런데 기철이 때문에 편지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도련님, 그 부부의 소원이 북한의 고향땅이 보이는 곳에 산을 사는 것이라면서요. 그 소원은 들어줘야겠다고 하셨는데, 산은 사셨나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주신 주소로 편지를 보냅니다. 늘 도련님을 생각하는 이 무지렁이를 기억해주십쇼.


  설마, 설마, 아내는 이 말의 모든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겠지? 드디어 영민이 부모님의 돈줄이 드러난 거잖아! 그러나 사건발생 22년째! 이것은 공소시효만료이다. 

    

  세상의 모든 것, 아름다움과 추함을 하얀 눈으로 덮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 듯, 나는 이 모든 것을 덮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영민이도, 이 영감도, 심지어 내 아내까지도,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은 경희의 마음을 흔들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 아니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영민이는 오전의 황톳길을, 경희는 오후의 황톳길을 걸어, 서로의 온기만 간직한 채, 영겁의 세계로 이어지게 하고 싶다. 온 우주를 뒤흔들며 모두를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게 하고 싶지 않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사랑의 단맛과 쓴맛보다 모두가 각자의 공간에서 평온하게 지내도록 하고 싶다.  

   

  아, 그런데, 이 새로운 세상에서 나의 이 사랑은 언제 공소시효가 만료되나? 

     

  아내는 무심히 가을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아내의 얼굴이 푸른 가을하늘색에 빛바래 파르스름하게 떨린다. 그래, 이제는 내가 그 깊은 숨을 토해내야 할 때인가 보다. 오늘 망망대해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가 있다. 나는 그 푸르디 푸른 가을하늘 바다에서 공소시효 만료를 꿈꾸는 이 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정착할 섬 하나를 발견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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