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게 하다.
작은 아이(두 딸 중 둘째 딸을 말함)가 우연한 기회에 고등학교 교환학생으로 미국을 가게 되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 갓 입학해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들과 너무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완강히 미국으로 가기 싫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좋다는 이 학교의 학비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은 아이가 이 학교에 입학할 당시에는 지금 처럼 중학교의 내신성적으로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입학시험을 쳐야 했다. 학교 공부만 해서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서 별도의 과외를 받아야만 그 학교의 시험문제를 풀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그 학교에 보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큰 아이와 같이 집 근처의 일반 고등학교에 다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 시험이라도 치게 해 줘. 꼭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왜 시험도 못 치게 하는데?"
기가 찼다. 시험은 그냥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원비를 어떻게 감당하냐? 지금 너 우리 형편이 어떤지 알지 않아?"
"엄마, 그러니 딱 3달만 학원을 다니게 해 줘."
거듭 부탁하는 아이 때문에 집 근처에 있는 학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한 달 학원비가 내 생각 밖의 액수여서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고민 중에 있는데 우연히 전단지 한 장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웃 도시의 학원 전단지인데, 작은 아이가 가려는 학교를 위한 시험 준비 수업이 곧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전단지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했다. 우리 지역 학원비의 딱 절반인데도 여기까지 차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친정에 전화해서 3달간의 학원비를 빌렸다. 작은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은 피곤해도 피곤하다는 소리를 못 한다. 작은 아이는 잠이 많은 편인데도 자신이 원해서 다니는 학원이어서인지 먼 지역까지 오고 가는 피곤한 학원생활을 피곤하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에고 고생하는구나.'라는 측은한 마음이 있었지만 나도 전혀 그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좋아서 시작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에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을 것인데, 이 정도의 일은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엄마, 나 합격했어. 우리 학교에서 4명이 합격했는데 나도 그 안에 들었어."
"뭐? 네가 합격했다고?"
작은 아이는 전교생의 4등 안에 들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다.(평준화 지역의 중학교인데도 우수학교로 소문이 난 학교이다.) 그래서 우리도 놀라고, 학교 선생님도 놀랐다. 오히려 가정형편의 어려움이라는 장애물이 이 아이에게는 공부에 대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촉진제의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작은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부모 된 나로서는 계속 기뻐할 수가 없었다. 합격한 아이를 그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보내기에는 경제적으로 벅찬,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친정과 시댁에 이 일을 알리니 모두들 기뻐하면서도, 시댁에서는 '6개월 다니면 많이 다니겠다'라고 하신다.
입학식 날 가보니 정말 좋은 학교였다. 그 해 첫 개교하는 학교여서인지 시설들이 보통 고등학교와 차원이 달랐다. 전국에서 몰려온 차들과 사람들로 학교는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간 허름한 붕고 차를 도저히 번쩍거리는 좋은 차들 옆에 주차할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외진 곳을 찾다 보니, 입학식이 거의 끝나게 될 무렵에야 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만든 파격적인 스타일의 멋진 교복을 입은 작은 아이는 정말 예뻐 보였다. 입학식 후 함께 기숙사로 향하는데, 작은 아이가 울먹였다. 이 아이는 입학식 내내 우리를 찾았다고 한다. 부모가 원치 않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입학식 당일에도 늦게 나타나니, 아이는 자신이 전혀 축하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모든 학생들과 부모들이 기뻐 활짝 웃는 이 날에, 우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주차 자리를 찾느라 늦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약간 움츠려있는 아이의 마음이 공기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미안해, 엄마가 오늘 늑장을 부려서 그래."
우는 아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나도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 날은 기쁘고도 슬픈 입학식 날이었다.
작은 아이는 빠르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갔다. 모든 아이들은 당연하면서도 당당히 누리는 학교생활이었지만, 작은 아이에게는 이 학교생활이 특별히 주어진 기회로 생각되어서인지, 모든 생활을 재미있어했고 즐거워했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주일에 한번, 토요일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이는 학교생활에 대해 고주알미주알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엄마, 학교급식이 호텔 수준이야."
"우리 식구들, 호텔에서 밥 먹은 적 없는데 어떻게 아니?"
"아니 아이들이 그렇다고 했어. 그런데 원어민 선생님 영어시간에 아이들이 너무 말을 잘하더라. 다 외국에서 적어도 일 년 이상은 살고 왔나 봐. 다들 너무 잘해."
"그 시간에 너는 뭐 했니?"
"그냥 가만히 있었지."
"괜찮았어?"
"앞으로 배우면 되겠지."
무한 긍정인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아이의 말에 때로는 가슴이 내려앉고 때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아이와 내가 얼마나 동안 이 상황을 잘 버틸 수 있을지를 생각하곤 했다.
우수한 선생님의 지도와 잘 짜인 학사일정으로, 학생들은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좋은 기회를 가진 것 같은데,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한 달에 몇 번 나오는 토요일에 선생님을 붙이는 과외팀을 짠다고 엄마들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학교 공부만으로도 넘치는데 또 무슨 공부를'이라는 말로 내 거절을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실상은 과외팀에 넣을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 작은 아이는 어느 과외팀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인 동시에 소외인이었다. 아이들이 대부분 과외팀끼리 뭉쳐서 다니는데, 작은 아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별로 위축되지 않는 담대함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아니면 나에게 그런 기색을 보이기 싫어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풍이라는 단어 대신에 '체험학습'이라는 명목으로 온 가정통신문 때문에, 나는 이 학교를 그만 다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4개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제주도, 일본, 중국, 미국. 제주도에서 시작된 여행경비의 액수는 가파른 상승곡선을 보였다. 여행, 특히 이제 막 인생의 가치관을 확립할 시기인 고등학생일 때, 그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여행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나는 너무 잘 안다. 기회와 여건이 주어진다면 장려하고 또 장려해야 할 항목이 여행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낮은 비용의 제주도까지도 경제적으로 버거운 나에게는 다른 아이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박탈감과 패배감을 작은 아이가 또 겪기를 원치 않았다. 인생은 언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끊임없는 노정을 가야만 하는데, 벌써 너무 뒤처진 출발점에 서 있는 작은 아이가 처량해 보였고, 또한 유능하지 못한 부모임을 늘 자각시켜주는 이러한 환경을 탈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미국무성 교환학생"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중3~고3까지의 학생이 미국의 가정에서 생활하면서 10개월간 공립학교에서 공부하는 프로그램이다. 비행기 삯만 해결되면 공짜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인 것 같았다.(나중에 경험해보니 액면 그대로의 프로그램은 아니었음.) 몇 번 큰 아이가 다니는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하면 어떻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NO!"라고 강하게 부인하던 작은 아이가 이 프로그램에 혹시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느 토요일, 나는 작은 아이의 손을 이끌고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협회를 찾아갔다. 아이는 Slep이라는 영어시험을 보았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적 결과를 받았다. 협회의 직원분께서 장학금을 주겠으니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엄마 때문에 온 것이지 자신은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나는 비행기 삯과 매달 현지 지역관리자 겸 카운슬러에게 주는 비용에다 협회에서 주겠다는 장학금을 뺀 경비를 계산해보니, 작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보다는 싼 경비였다.(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알게 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좋은 취지가 많이 퇴색된 것에 속 상했다. 미국 가정은 세금의 혜택을 받고 외국학생을 공짜로 10개월간 돌보아 주기 때문에, 당연히 가족의 일원으로 가사분담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카운슬러비로 생각보다 거금을 협회에 지불하기 때문에 현지 가정의 여러 가지 요구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종종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현지 가정은 '너를 공짜로 먹여주고 돌봐주니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니'라고 생각하고, 한국 학생은 '나도 낼만큼 돈을 지불하고 왔으니 제발 공부만 하게,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게 날 좀 가만 놔두세요.'라는 태도로 행동한다. 이런 이해상충 때문에 중간에 돌아오는 학생들도 있다. 또 어떤 가정을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어떤 학생은 텍사스의 한 가정에 배치되었는데 10개월 동안 마구간에서 말똥만 치우다가 왔다고 울먹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현지 가정의 양자가 되어서 그곳에서 계속 학업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학생도 있었다. 본인이 가고 싶은 주나 도시에 가는 것이 아니라 협회에서 정해주는 곳에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로또게임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프로그램의 취지대로 비행기 삯만 있으면 시골 농촌 아이도 미국 학교를 체험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다시 개선되어야만 한다고, 작은 아이의 일을 처리하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나는 작은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미국으로 가게 만들었다. 작은 아이가 그 학교에 다닌 지 딱 6개월 만, 즉 1학기를 마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