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11월 9일), 은희를 만났다. 10여 년 전 중학교에 근무할 때 가르친 아이인데, 이제 24살로 청년이 되었다. 학교에 있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인이 잘 났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것이지, 선생님의 도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부족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도움에 고마워하고, 그 고마움을 가슴에 새겨서 종종 연락을 한다. 은희도 그중의 한 명이다.
은희는 많이 부족한 아이였다. 외모도, 공부도,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아이가 아니었다. 늘 혼자서 급식을 먹는, 친구가 없는 아이였고, 유일한 말상대는 오히려 선생님들이어서, 은희는 늘 영어어학실을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고등학교에 가서 '지적장애' 판정을 받았는데, 그 판정이 이 아이와 그 가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선생님, 지적장애가 무슨 말이에요?"
은희가 전화해서 물은 이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은희야, 지금 고등학교(실업계 고등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지?"
"네!"
"그럼, 아무 문제없어! 그냥 해오던 대로 하면 돼. 너, 영어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했잖아! 그럼 잘하고 있는 거야"
"네, 선생님! 저 중간고사 영어시험에서 70점을 받았어요"
"그럼 됐어. 그런 말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러버려"
그러나 '지적장애'라는 그 판정은 은희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낮은 자존감에 덧붙여, 매사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되었다.
은희는 전문계 학교에 가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하고, 경기도에서 서울 직장까지 왕복 4시간을 마다하지 않고 다닌 성실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토요일에 만나자고 하는 것은 지금 직장을 다니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은희야,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네, 매니저가 저를 때렸어요."
"뭐라고? 무슨 그런 나쁜 사람이 있어? 너를 왜 때리니?"
"갑자기 컵을 제 앞에 딱 놓더라고요. 저는 왜 그러는지 몰라, 가만있었어요. 그런데 왜 씻지 않느냐고 하면서 저보고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저에게 물건을 집어던졌는데, 머리를 심하게 맞았어요."
"무슨, 무슨, 그런 나쁜 놈이!"
"그래서 다음날 직장에 가지 않았어요. 그 길로 그만뒀어요"
"잘했다, 잘했어!"
은희는 올 2월에 그 일을 겪은 후 공황장애에 시달렸고, 이제 조금 회복되어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복지관에 다니면서 잠시 팝업 북을 접고 있어요. 그러나 내년부터 제가 좋아하는 바리스타 일을 계속하게 되었어요. 이미 한 구내식당과 계약을 했어요."
"다행이다, 은희야!"
"선생님, 제가 복지관 선생님에게 계속 이 질문을 했었어요. '저 때문에 화나셨어요?' 제가 한 7번쯤 이 질문을 하니까, 복지관 선생님이 계속 그런 질문을 하면 상대방이 곤란해한다고 하셨어요. 선생님, 그래요?"
"은희야, 왜 그런 질문을 하니?"
"상대방이 저 때문에 화났을까 봐 항상 마음이 쓰여요. 상대방의 안색이나 표정이 안 좋으면 불안하고 두려워요."
" 은희야, 너, 자신감을 가져라. 첫째로 너, 중학교 때 비해서 정말 많이 예뻐졌어. 지금 치아교정도 하고 있고, 또 입술수정 수술도 했잖아. 지금, 다른 사람들이 너를 이상한 아이로 보지 않아! 둘째로 너는 실력 있는 바리스타야. 그리고 셋째로 특히 너는 이 세상을 다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잖아!(그 가정에서 이 아이만 예수님을 믿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학벌지상주의인 이 대한민국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당하는 그 차별은 한 사람의 인생을 초라하고 이처럼 왜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를 보면서,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찰스 테일러의 이론을 근거로 한다.)
엣 시대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다른 말은 '나는 내 의무이다'로 결론이 난다고 한다. 즉 공동체 안에서의 그 사람의 위치, 역할이 그 사람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로, '나는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
현대에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내 욕망이고, 나는 내 꿈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나는 나의 것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나의 정체성은 나 자신의 판단, 평가, 감정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진정 뭘 욕망하는지를 잘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 원하는 것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공과 지성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성공과 지성의 노예가 되어 그 틀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여 꿈을 이룬다면 또한 그 가치가 지속적인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허무함을 느끼고, 혹 그 꿈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은 곧 악몽이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이 나의 것'인 사람은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교만과 자학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해 팀 켈러("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의 옷을 입은 사람이다. 우리의 주권을 주께 드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세상사람들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나, 내가 내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이 우리를 핏값으로 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외모가 어떠하든, 능력이 있든 없든 이 세상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능력이 없어 좌절하거나 혹은 능력이 있어 교만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또 부족하면 "능력 주시는 자"가 있기 때문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혹은 나 자신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전혀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 말들을 수긍하면서, 오히려 그 말들에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발전의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중학교 때, 외모 때문에 고생했을 은희를 데리고 나가, 멋진 자켓을 하나 사 주었다. 외모를 많이 다듬은 은희는 이제 누가 보아도 젊디젊은 싱싱한 청년의 모습이다. 거기에 돈을 좀 써니, 은희의 겉모습이 아주 멋지게 바뀐다.
그러나 은희도, 우리 모두도,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를(고후4:16)" 바란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염려, 두려움 대신에 평강이 넘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의식하지 않는 자유함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오히려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풍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고후4:18)"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