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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14 (교만에 대해)

(패드릭 몰리 저) 교만에 대하여

by 김해경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야고보 4:6)"


교만은 우리의 강점을 다른 이의 약점과 비교하는 비교의 죄이다. 우리는 좋은 느낌을 가지기 위해, 다른 이들을 깔본다. 때로는 말로, 그리고 때로는 정신적으로 그렇게 한다. 다른 이들을 깔보는 가장 쉬운 길은, 지위와 성취가 부족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약점을 우리의 강점과 비교하는 것이다.


교만이라는 교묘한 죄가 모든 그리스도인을 기만하고 있다. 죄 중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죄인 교만은, 마치 바닷물이 해변에 세운 모래성 주변의 해자 속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오듯, 그리스도인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가 교만의 죄에 빠지는 것은 그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힘만 빼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두 유형의 교만

성경은 두 유형의 교만에 대해 묘사한다. 첫째 교만 유형 1은 갈라디아 6:4에서 발견된 올바른(적절한) 유형의 교만이다. "각각 자기의 행위를 살피라. 그러면 자신을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교만 유형 1에 이르는 핵심은 우리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시험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보라는 권고를 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잣대에 비추어 좋은 점수를 받을 때,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 자신을 축하할 수 있다.


교만 유형 2는 끈질기게 그리스도인에게 접근하고 있는 가짜 우월감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들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에, 영성이 덜한 사람을 깔보기 쉽다. C.J.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교만한 사람은 늘 일과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물론, 당신이 그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당신은 당신 위에 있는 무언가를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 즉 "자기는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눅18:3)"에 대해,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어느 종교 지도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기가 다른 이들-강도, 악행 하는 자, 간음하는 자, 그리고 지금 자기 근처에 있는 세리 같은-그런 자와 같지 않고, 자신이 훌륭한 사람인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세리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을 청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맺으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8:14)" 이 바리새인은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대가로 자신을 높였다. 곧 자신을 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약한 인간과 비교함으로 우쭐거린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자긍심으로 가득 차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자신보다 못한, 경제적 능력이나 학식이나 정신력에서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택하여 비교한다. 우리가 다른 이에게 있는 약점을 끄집어내어 비교하는 것은, 교만이란 죄는 나의 장점을 다른 이의 약점과 비교하는, 비교의 죄이기 때문이다.


두 유형의 겸손

두 유형의 교만이 있는 것처럼, 두 유형의 겸손이 있다. 로마서 12:3에서 올바른 유형의 교만과 올바른 유형의 겸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우게 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겸손 유형 1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은 자신에 대해 적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진부한 표현을 긍정한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깔보지 않는다. 그는 교만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겸손할 수 있다. 즉 그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자랑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겸손할 수 있다.


겸손 유형 2는 교만 유형 2와 정반대이다. 만약 내가 나의 약점과 당신의 강점을 비교한다면, 나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끝나게 된다. 자기 경시는 자신의 정신과 마음에 대해 아주 험하고 해로운 독이다. 자신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해로운 만큼이나, 자신을 지나치게 낮게 생각하는 것, 역시 당신을 평범한 삶에 국한되어 살도록, 형을 선고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올바른 균형 유지하기

우리 모두는 교만/겸손이라는 평균대 위를 걷는다. 우리는 교만 유형 1과 겸손 유형 1을 올바르게 조화시키면서,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평균대를 건너가야 한다. 우리는 교만 유형 2나 겸손 유형 2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평균대 위에서 미끄러져 교만 유형 2쪽으로 떨어진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균대 위에서 미끄러져 겸손 유형 2쪽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교만과 겸손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걸어가야 한다. 교만과 겸손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우리는 교만 유형 1과 겸손 유형 1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깔보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행동을 시험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 이상으로 생각해서도 안되지만, 정당하게 우리의 믿음을 따라,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이 너무 많은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풍요롭고, 번성하게 하며, 명예롭게 해 주실 때가 있다. "하나님을 믿으니 이런 축복이 오는 걸세"란 말을 듣게 된다. 그런 성공의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깔보고, 내가 이룬 성취를 내세우기 시작하는 교만이 싹튼다. 세속적인 성공에 우쭐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은밀하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로 결정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사라지기 시작함을 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신다. 우리를 충실하게 훈련시키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최선의 교육이고, 영적으로 가장 값진 보상을 주는 경험이지만, 그런 상황을 반복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 과정이 어리석은 교만에서 우리를 구해내시는 과정일지라도, 아무도 그 과정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만족스러운 상황에 처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며,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며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사람이 경외감과 두려움을 지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가 받을 만한 것을 주실 힘과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우리를 교만 유형 2로 이끌어간다.


다윗왕은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시 36;1~2)"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해져서, 그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고 다윗왕은 말한다.


우리의 강점이 또한 약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적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도덕이 실제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우월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자기 의가 커질수록, 우리는 교만해질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하나님은 교만한 종교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더 좋아하신다.


사람들은 사회를 서열화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서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서열로 바라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셨다.


교만의 징후는 아주 명백하다.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1~3)"

내가 다른 이를 거칠게 비판한다면, 다른 이들 역시 나를 거칠게 비판할 것이다. 교만은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 교만은 인간의 모든 죄의 조상이다. 교만은 우리를 불일치, 질투, 자만, 오만함, 자랑, 분개, 시기, 오만, 독단, 증오, 자기 의, 사람을 판단하려는 태도, 그리고 거룩한 체하는 태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신다. 우리 역시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한 삶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과 기꺼이 교제하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모든 이들을 미워하신다. 그들은 벌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모두는 교만의 죄를 짓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낮추셔서 우리의 교만한 결과들-수치, 파멸, 절망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갖고 계신 계획과 반대되는 일들을 겪게 하신다. 우리 중 아무도 실제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교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사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겸손한 삶을 사신 예수님께 그런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예수님이 주시는 힘으로, 우리는 교만을 극복할 수가 있다. 이것이 교만을 정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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