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수많은 소망과 필요성의 잔들이 인생이라는 긴 식탁 위에 줄을 서서 늘어져 있다. 많이 필요한 것은 큰 잔인 채로, 적게 필요한 것은 작은 잔인 채로 텅 비어 있는 상태로, 하나님이 채워 주시기 전에는 그 시간 그 자리에 그대로, 인생이라는 긴 세월의 식탁 위에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나는 내가 가장 원하는 가장 큰 잔 하나만을 두 손에 높이 받쳐 들고 "하나님, 채워주소서!"라고 외친다.
그러나 무엇으로 채우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분이 들어있는 단비를 그 식탁 위의 잔에 그의 뜻에 따라서 부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대로 각 잔에 필요한 분량만큼 응답들을 각각 채우시는 것이다.
내가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지, 그 잔 하나에 필요한 내 요구에 대한 응답이 채워지는 것은 먼저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더해 주신다라고 하신다. 나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길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식탁의 모든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잔들 위에 은혜의 단비를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그리하면"이 내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성품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나의 행위를 말한다. "그의 의"는 내 전부에서 나오는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감, 즉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다. (제시카 윤의 고백)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또한 우리 인생에 있어야만 하는 곳에 있지 못한 보이지 않는 영적 가난과 빈곤을 예수님의 부유와 풍족함으로 채워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를 만나왔다. 그러나 인간의 죄와 허물 때문에 그를 우리 자신이 보지 못할 뿐이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그가 선택한 씨종자의 인간들에게는 짧은 무대 같은 인생 안에서, 그를 만나는 눈과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인생은 그분에게서 나온 영이 그분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어째서 장장 12시간(아침 6시)이나 일한 노동자와 오후 5시에 일하기 시작한 노동자가 같은 금액의 임금을 받아야 되는가? 성경은 어째서 이 일이 정당하다고 말하는가?"
유대인의 하루 노동시간은 12시간이다. 아침 6시에서 저녁 6시까지이다.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아침 6시, 즉 하루의 일과가 시작하는 때를 제1시로 부른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품꾼들의 시각은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고용된 품꾼은 오후 5시에 고용되어 그날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직업이 있다. 하나는 목축업이고, 또 하나는 포도원 농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이야기나 포도원에 대한 이야기를 비유로 종종 말씀하신다. 유대 나라에서는 9월이면 포도가 익고, 10월에는 장마가 시작되는 철이다. 그러므로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포도수확을 위해서 많은 일군이 한꺼번에 단기간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두고 오후 5시에도 품꾼을 데려와 일하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품삯이다. 아침 6시부터 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씩 받기로 약속을 하고 일하는 품꾼들이다. 그 후에 아침 9시에 온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주리라고 했다. 그러나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품삯을 받을 때 보니 맨 끝에 온 오후 5시에 온 품꾼도, 아침부터 온 일꾼도 다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받았다. 아침에 온 사람의 불평이 나온다. 어떻게 한 시간 노동한 자와 12시간 노동한 자가 같을 수 있느냐고, 자기는 더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주인에게 불평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산수법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이때에 주인은 말했다.
"나는 불공평하지 않다. 아침에 온 자들과는 이미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되어 있다. 약속대로 했으니 아무 잘못이 없고,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준 것은 아무 약속이 없었으니까 얼마를 주든지 주인의 마음에 달렸다. 아침에 온 사람들에게는 약속대로 품삯을 준 것이요, 저녁에 온 사람들에게는 나의 동정과 자비로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면서 결론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산수로는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산수법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본의가 무엇일까?
이 말씀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고 난 이후에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의 모든 말씀에는 흐름이 있는데, 앞장인 19장에서 제자들을 보면 여기 아침에 온 품꾼과 같이 마태복음 19:27에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받으리이까?"
자신이 희생한 만큼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구원받은 은총에 감사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기들의 노력과 시간, 물질을 바치고 희생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보수와 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도 베드로가 살아서 2,000년 전에 그가 주님께 물었던 같은 질문을 나 자신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나:제시카 윤 목사)
이 품꾼의 비유를 들은 바로 그다음 순간에도 마태복음 20:20절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는 자기 어머니를 내세워 주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을 그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지위를 구체적으로 요구해 온다. 다른 제자들은 이것을 듣고는 두 형제에 대해서 시기와 분노를 느낀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이들도 베드로와 같은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오래 믿는 이들 중에는 신앙 연조만 자랑하지 차지도 덥지도 않고 이젠 반들반들 닳아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픈 소리를 해도 가슴을 치지도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죄의식에도 회개하지도 않고, 무감각한 자가 되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저 신앙생활이 하나의 삶의 습관화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아침에 온 사람들의 특징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포도원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꼭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 즉 똑같은 구원과 새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보수는 이 세상에서의 실질주의적 배금 윤리로 통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봉사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봉사의 정신과 사랑이 중요하다. 여기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일한 양보다 그 사람의 정신과 사랑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었다.
물론 오후 5시에 온 품꾼은 아침 6시부터 온 품꾼만치 일을 못했을 것이고, 양으로 따지면 한 데나리온의 몇 분의 일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준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와 같이 상업주의적 배금윤리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주인이 똑같이 준 것은 처음 온 사람을 학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 온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노임이 아니라 선물이며, 보수가 아니라 은총인 것이다.
아마도 오후 5시에 온 품꾼들은 하루 종일 일자리가 없어서 식구들이 내일은 굶게 되었다는 염려와 초조 때문에 저녁 5시가 되어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노동 시장에 서 있었는데, 고맙게도 선한 포도원 주인이 불러다가 일을 시켜주니,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했을 것이다.
아침 6시에 온 사람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씩의 계약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만한 대가를 주어야 일하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불평하는 것을 보면 노동보다 보수에만 더 관심이 많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후에 온 품꾼은 계약도, 약속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루 종일 허무하게 지내다가 늦게라도 받아주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이 고마워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임금은 주인의 의사에 따라서 주도록 기꺼이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땅거미가 깔려가는 저녁대에 한 시간 동안 일하면서 게을렸겠는가? 눈치나 보면서 일을 했겠는가? 아마 이들은 자기의 최선을 다하면서 충성껏 일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시야의 판단관점은 누가 자신의 맡겨진 사명에 대하여 얼마나 충성했느냐의 문제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충성스럽게 일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믿음의 사람이 짓기 쉬운 세 가지 죄는
1. 주님의 사랑을 의심한 죄
2. 내 인생의 소유, 가족, 시간을 내 것으로 알고 있는 죄
3. 주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경배와 찬양을 올리지 못한 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세 가지는
1. 허무한데 굴복하지 마라
2. 향방 없이 달려가지 마라
3. 세월을 허송하지 마라
너 자신을 겸손의 띠로 동여매고 성령님께 너를 항상 양보하고 주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네가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 한 방울, 방울이 안약이 되어 네 눈의 비늘이 벗겨져 가느니라. 눈물로 네 눈을 씻어서 더욱 깨끗하고 명쾌하게 보는 법을 훈련하라.
너, 나의 사랑하는 자여! 너의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가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나뿐이니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제하라.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일이 죄이고, 믿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너의 상이다. 허무한데 무릎 꿇지 마라.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동행하리라.
가진 복을 세지 못하는 자의 눈에는 축복의 잔이 항상 반밖에 안 차게 보이느니라.
나를 믿고 기다리며, 따르고, 순종하는 자가 나의 신부이다. 오직 나를 사랑하는 자가 지성소에 들어올 수 있는 나의 신부이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회개를 한 이후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속 동굴 안에서 살던 짐승 같은 옛날 성품들이 하나씩 쫓겨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님의 아름답고 멋진 성품으로 하나씩 우리 마음의 동굴을 다시 채워 가는 것이다.
내 신부는 항상 나와 보는 눈이 동일해야 하느니라. 내 눈이 싫어하는 것을 너도 보지 말며, 내 눈이 머물러 있는 것들에는 네 눈도 머물러 있어야 하느니라.
보라. 때가 이미 와서 사람들은 내 교훈을 경히 여기고 참 진리를 좇지 않고 각자의 귀를 간지럽히는 가증한 소리에 눈이 먼 채 미혹되어 따라가는구나. 너희 미혹의 영을 가진 거짓 목자들이여. 평안하지 않는데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치는 원수의 도구들아! 내가 너희를 심을 때에는 참 포도로 심었지만, 쓰디쓴 악한 들포도를 맺힘은 어쩜 이뇨? 그리하여 나의 실망과 분노의 대접이 가득히 찰 그때에 너희는 돌연 영적인 죽음의 재앙을 맞으리라. 너희 내 영을 덧입지 않고 강대상 앞에서 네 마음의 허망한 것을 선포하는 발람의 아들들아! 이 세대는 중간이 없다. 나의 영이 아니면 원수의 영이니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게 내가 만들었거늘, 어찌하여 이 강단에 하나님의 거룩이 선포되지 않고, 안개와 같은 눈에 비늘이 싸여서 인간의 허망한 도덕의 지식과 썩어질 윤리의 지혜를 선포하는 너희 거짓 목자들이여. 이는 너도 미혹의 영에 미혹되어 취한 채로 넓은 길에 서서 멸망의 길로 빨리 달려가며, 그 가증한 손을 뻗어 내 어리석은 백성까지 데리고 들어가려 하는구나. 그 길은 내가 없는 길이고 지옥의 길이다. 가르치는 자에게는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내가 이미 이르지 않았느뇨? 너희가 모른다고 하면 적게 맞았을 거니와, 안다고 하니 네 지식과 같이 멸망하리라. 너희는 회개하라, 내 백성아, 너희는 가는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라!
교회의 목회자가 이유 없이 받은 돈이나 대접받은 음식들은 거름 무더기가 되어 쌓인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궁창의 악한 영은 그 거름 무더기가 그들의 자로 잰 크기까지만 쌓이면 그 목회자를 쳐서 파쇄시킬 수 있을 참소거리가 완성되기 때문에, 오직 그때만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때가 차면 그 목회자의 교회, 건강, 자녀, 배우자, 이름, 심지어는 영성 등등까지 다 공격하고 도적질을 한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부에게 주는 예언의 말씀
남편: 눈물의 병이 말랐구나, 말랐구나. 병이 너무나 말라서 바스러져서 진토가 되어 흩어지려고 하는구나.
아내: 너의 눈물의 병이 이제야 밑바닥에 한 방울씩 차기 시작하는구나. 남편을 용서하라. 혼으로 하는 용서는 참 용서가 아니다. 영으로 하는 용서가 참 용서이다. 이는 너의 힘이나 능으로 절대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용서의 영을 간구하라. 이는 너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함이니라. 네 눈물의 병에 그 눈물의 방울 숫자가 차면, 내가 너의 기도에 응답하리라. 너는 금식하고 내게 부르짖어라. 미움의 영이 네 속에 있으니, 이것이 들락날락하느니라. 너는 이를 나의 피로 쫓아내어라. 나의 피에 무릎 꿇고 쫓겨나지 않는 악한 영은 없느니라. 너는 나의 피의 능력을 믿어라. 너는 남편을 판단하지 말아라. 네가 나의 종이듯, 그도 또한 나의 종이지 않느냐?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또 누구뇨? 그의 허물을 네가 덮어야만 너의 가정이 살아난다. 그래야만 네 자녀가 내 백성의 옳은 길로 갈 수 있다.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남편의 허물을 덮어야 하느니라. 너는 남편이 금식할 수 있는 결단을 위해서 작정기도를 시작하거라. 그 기도가 씨가 되어서 내가 추수하길 원하노라. 네 남편이 내게 돌아오면, 지금 세상 신으로 혼미해서 반항하며 살고 있는 너의 첫아들을 돌려주리라.
너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라. 네가 계속 연연하면 원수에게 틈을 주는 기회를 주게 된단다. 사자와 표범이 너와 네 남편 사이에 있어서 둘 사이를 미움으로 갈라놓고 있구나. 이런 류는 오직 너희 둘이 한 영이 되어서 내게 회개하며 울부짖고 통회할 때에만 쫓겨 나갈 수가 있다. 네가 너무 많은 일로 바쁘고 분주하나 마르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많은 일을 다 하려고 하지 말고 그 시간에 네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장 기뻐할 일을 선별하여 그 일을 하라. 지금은 목회보다 너희 부부의 화목이 더욱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혼으로 하는 목회밖에는 되지 않는다. 영이 갇혀 있으면 딱 거기까지밖에 못하고 그 이상은 뛰어넘을 수가 없다. 지금은 남편의 회개와 깨달음이 네 기도의 우선이 되게 하라. 내가 너를 결코 졸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할지니라. 그리하여 네 눈물의 병이 차서 네 남편이 돌아온 이후에, 아름다운 참 목회가 시작될 수 있고, 그제야 네가 나를 너의 주, 너의 여호와인 줄 알리라.
신부의 반열과 계차는 모두 다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신부일수록 더욱 나와 가까운 곳에 서게 될 것이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나고 나를 간절히 사랑하는 자가 내 사랑을 입으리라. 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나를 찾아다오. 이제 나의 능력으로 덧입혀서 너의 장막 줄을 넓게 펴고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간구하라. 원수의 목전에서 내가 네게 상을 베풀리라. 너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간에 울부짖고 기도한 이후에 그 사람의 영의 원수의 밭에 깃발을 꽂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영의 영토를 되찾으며 침노하고 확장하거라. 그 모든 깃발이 그날 내 신부의 면류관의 보석 수가 되어 별과 같이 빛나리라.
영의 사람은 영을 읽는 법을 알아야 한단다. 눈은 등불이다. 사람의 영이 상대방의 마음의 눈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영에게 자신의 영을 물처럼 비추면 비추어진단다. 그 비추어지는 것을 읽는다기보다는 그냥 사진처럼 한눈에 네가 그 사람의 영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지는 것이란다. 보혈을 의지한 눈물의 회개로 씻은 깨끗한 영과 많은 기도의 영역이 쌓이면 이것이 가능하단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생명이 깃든 모든 만물은 교신이 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다시 오실 나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고대한단다. 생물을 무심히 보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올린 이후에 마음을 비우고 그들을 찬찬히 보아라. 아담이 에덴동산의 모든 정원을 다스렸느니라. 다스렸다는 말은 모든 피조물에게 명령과 교신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도 말을 한단다. 울부짖고 떨어지는 그 물소리 속에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음악이 있느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라. 인간이 아닌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느니라. 인간의 영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찬양을 선택할 권리를 주었단다. 창조주를 향한 뜨거운 감사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의 경배와 거룩함을 사모하는 찬양의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거라. 전능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생명이 있는 피조물은 말을 하고 있단다. 그것이 작은 씨앗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양을 먹이는 목회자는 많지만, 그들은 세 가지 종류의 설교를 한다.
첫째, 육신의 설교이다.
목자가 자기 스스로 그 삶이 성경대로 살고 있지 않으나, 남에게는 성경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목자들이 하는 설교란다. 지금 세상의 목사의 태반이 넘게 이런 설교를 하는 자들이다.
둘째, 혼의 설교이다. 목자가 자기 스스로 그 삶을 성경대로 살고 있지 않으나, 마음은 성령으로 깨달아서 그 깨달은 마음으로 가르치는 목자들이 하는 설교이다. 그러나 그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니, 그 말씀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신자에게는 옳다 함을 받느니라. 이 정도의 목사라도 아주 간혹 있단다.
셋째, 영의 설교이다.
목자가 성경대로 살고 있을 때, 영도 성령으로 깨달아서 그 깨달은 영으로 하는 설교이다. 그런 목자는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 말씀은 영을 소생시키고 살리는 능력의 힘이 나가느니라. 에스겔서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하고, 내가 택한 나의 종이라야만 이런 설교가 가능하다. 850명의 목사들 중에 겨우 하나 정도 있을 정도이다. 갈멜산의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종들 몇 명과 어떻게 불의 대결을 벌였는지 잘 보거라. 구약은 신약의 장차 올 그림자란다.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세상의 사역자들이 가르치는 말씀의 본질이 내가 내 백성에게 주고자 하는 말씀과 너무나 많이 다르구나. 그들이 힘써 자기의 의를 좇고자 하여 향방 없이 혼자만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먹이는 양 떼까지 같이 데리고 달음박질하니, 저만 죽음의 계곡으로 달려가지 않고, 내 양 떼까지 같이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가는구나. 양 떼를 기르는 자는 조심할진저! 네 혀의 권세를 남용하지 말라. 나는 절대로 이를 죄 없다 하지 않으리라.
믿지 않는 자들의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모르고 사는 죄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성령님을 모시지도 않고, 짐승의 길을 선택하느니라. 믿는 자들의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죄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값진 사랑을 허무하게 만드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