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거의 26년 만에 이사를 했다. 삼층 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옮긴 것이다. 언니는 이 삼층 주택을 자신의 마지막 집으로 생각하고 집을 지었다. 이층까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놓고 삼층에 살면서, 집안 구석구석을 언니의 취미인 아기자기한 물건들과 형부의 취미인 목공작품들(책꽂이, 화장대)로 꾸며 놓았다. 특히나 옥상은 형부의 놀이터로, 손자, 손녀들을 위한 미니수영장과 미니 분수대까지 만들어 놓으시고, 그곳에서 하루 중 몇 시간을 보내곤 하셨다.
그런데 지난겨울, 혹독한 날씨가 며칠간 지속되면서 보일러가 고장 나고 물이 어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자녀들이 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골목길에 주차하기 힘들다, 점점 연세가 드시면 삼층을 오르내리기가 힘드신다' 하면서 이사를 권유했지만, 전혀 마음의 요동이 없으셨던 두 사람이, 보일러 사건을 겪고 나서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젊었던 시절과는 달리 이제 집안의 크고 작은 고장들이 힘에 겨운 일이 되어, 견디어내기가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주택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날짜를 정한 후, 거의 한 달 이상을 짐 정리, 즉 물건 버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끊임없이 버려도 구석구석에 쌓인 물건들이 어찌나 많은지, 버려도 버려도 끝이 나지 않을 전쟁을 겨우 끝내고, 마침내 이사를 하셨다. 두 분 다 지칠 대로 지치셨고, 언니는 이사 후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잇몸이 흔들려 치과를 계속 다니고 있다.
4년 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짐 정리를 해야 한다고 언니가 나를 불렀다. 우리는 24평 아파트에서 엄마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특히 나의 눈에 띈 것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개장이었다. 엄마는 자개장을 좋아하여 멀리 통영까지 가셔서, 이불장과 옷장, 장식장을 맞추셨다. 엄마의 정성된 손질 때문에 아직도 자개장은 새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가져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 언니에게도 나에게도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옛 고가구를 사고파는 가게에 전화를 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시큰둥하더니만 결국 "NO"였다. 우리는 유품 정리 회사에 전화를 했고, 돈을 주고 엄마의 모든 물건을 정리했다. 한 때 사랑받던 물건들이 쓰레기가 되어 실려져 가는 모습을 보며, 사람만 세월무상(無常)이 아니라 애지중지하던 물건도 무상(無常)함을 느꼈다.
이번 겨울, 남편과 나는 한 방만을 사용하기로 했다. 산 밑에 있는 집이라 겨울이면 유난히도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곳이다. 큰 한 방에 남편이 사용할 책상과 나의 책상, 책꽂이, 한쪽 구석에는 소파, 다른 한쪽에는 이부자리를 펴 놓았다. 그리고 모든 창문을 블라인드로 막으니, 제법 아늑한 원룸이 되었다. 한 방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각자의 책상에서 할 일을 하면서, 겨울 내내 따뜻하게 지냈다. 청소할 것 별로 없고, 난방비를 절감하며, 남편과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왜 진작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나' 하는 약간의 후회까지도 한 이번 겨울이었다.
원룸 같은 방에 살아보니, 사람이 살아가는데 너무 많은 물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비의 사회"를 쓴 장 보들리야르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현대의 인간을 표현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동력이 생산과 절약이라면, 20세기 자본주의의 동력은 소비로, 그 기저에는 인간의 욕망, 특히 '보이는 차이'를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작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보이는 차이'는 사회적 위세와 권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쉬운 예로 자동차는 탈것이라는 운송수단으로, 큰 차, 작은 차, 국산차, 외제차, 모두가 다 거의 유사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작은 차보다는 큰 차, 국산차보다는 외제차를 선호하는 것은 그 차의 이미지가 갖는 신분상승, 즉 사회적 지위를 사기 원한다는 것이다. 보들리야르는 이를 "기호 내용(기의)"을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결코 사물 자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 짓는 기호로서의 사물을 항상 조작한다"
사회는 소비를 조장하는 메커니즘으로, 우리의 소비욕구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즉 내가 원해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나를 욕망하게끔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사람들은 멀쩡히 잘 사용하는 핸드폰을 두고, 새 기종이 나올 때마다, 심지어 새벽부터 줄 서기를 하면서까지 핸드폰을 바꾸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이제 영혼적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한 구원을 찾는다. 사람들은 소비의 계급적 제도에 순응하여, 더 나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더 멋있어 보이고, 더 비싼, 남과 구별 지워줄 물건들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쓴다.
이처럼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디서 먹느냐'가 더 중요해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언니가 버린 무수한 물건들도, 엄마의 자개장도, 그리고 나의 집에 줄줄이 걸려있는 수많은 옷들도 이러한 욕망의 반영이 아닌지를, 나의 자존감의 뿌리가 '나 자신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내가 가진 물건들'에게 두고 있지나 않는지를 나는 오늘 생각해본다.
비록 누구도 귀히 여기지 않지만, 오월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내 호흡 속으로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