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5,6세로 기억된다) 선명하게 떠 오르는 기억 중 하나로, 설날 아버지를 따라 세배하러 간 시골의 어느 친척 집에서, 매여 있던 개가 나의 빨간 새 털신을 물고 가 털을 마구 물어뜯어 신을 못 신도록 망쳐놓은 기억이 있다. 옛날에는 추석, 구정 명절에만 새 옷, 새 신발을 얻을 수 있었는데 개에게 빼앗긴 새 신발이 서러워서 엉엉 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개를 싫어하여 개만 보면 멀찍이 돌아서 간다.
어릴 적 며칠 만에 한 번씩 나타나는 엿장수를 기다리는 것이 아주 큰 즐거움이었다. 엿장수의 "엿 사려"하는 외침과 철거덕 거리는 가위 소리가 울려 퍼지면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우르르 엿장수의 리어카 앞으로 모여들었다. 리어카 위 엿판 안에는 일반적인 허연 쌀엿과 누런 호박엿이 엿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아이들이 빈 병, 양은 냄비, 주석 조각 등을 가지고 오면, 엿장수 아저씨는 정말 엿장수 마음대로 엿정을 엿 위에 놓고 엿가위로 엿정 위를 탕탕 쳐서 엿 몇 조각을 떼어 주었다. 나의 어머니는 너무 알뜰하셔서 다 낡은 양은그릇도 수세미로 빡빡 닦아 다 닳을 때까지 사용하셔서 엿 바꿔 먹을 고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고물을 한 아름 안고 오는 아이들이 늘 부러웠다. 어린 시절의 그 결핍 때문인지 나는 사탕 살 일이 있으면 꼭 호박엿을 산다.
'슬픈 감정을 덜 느끼게 해 주는 것을 기꺼이 시도했다'라고 하면서 영국의 해리 왕자는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을 잊기 위해 폭음과 마약을 했다고 말한다.
헤어진 애인이 유난히도 보라색을 좋아해서 보라색만 보면 그녀가 생각나서 괴롭고, 그래서 보라색을 자신의 색상표에서 제거하기로 했다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보라색이 들어있는 제품은 그의 구매 대상에서 제거되는 수난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수많은 기억의 파편 때문에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애잔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어떨까?
로이스 로우리(Lois Lowry)의 저서 "기억전달자(The Giver)"의 사람들은 나쁜 기억이 없다. 인간이 살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만들기 위한 하늘에 설치된 장비 때문에 사시사철 날씨는 온화하다. 감히 자연은 폭설, 폭우 등의 심술궂은 날씨로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 아이를 낳는 산모가 정해져 있어, 아이는 모든 가정에 분배된다. 엄마는 아이 낳는 수고와 번거로움이 없다. 오랜 관찰을 통하여 그 부부에게 딱 맞은 아이가 각 가정으로 보내어진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이 있을 수 없으며, 인구 과잉도, 감소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이는 12살이 되면 역시 오랜 관찰(감시?)을 통한 '원로위원회'의 결정으로 본인에게 딱 맞는 직업이 허락된다. 이 책에서 단지 내가 보기에 좀 귀찮은 일은 매일 아침 어젯밤에 꾼 꿈을 고백하는 고백 의식과 저녁에는 그날 하루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가족(부부와 딸 하나, 아들 하나:고정된 가족형태) 간에 서로 나누는 일이다. 이 일을 통하여 이 사회에 허락되지 않은 생각들을 걸러내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살 만큼 살면 거창한 생일 파티가 주어진 후 임무 해제가 된다. 즉 이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들은 제거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고통, 걱정, 근심이 없다. 성욕조차 약으로 제어되기 때문에 범죄가 없다. 사람들의 이기심에 의해 벌어진 세상의 모든 악한 일들을 없애기 위해 인간에게서 모든 감정과 색에 대한 감각과 과거의 기억을 제거함으로 평온하면서도 효율적이며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 사회에서 단지 한 사람만이 원로위원회 외에는 누구도 그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기억 보유자'로 선정된다. 이 책의 주인공 조너스는 12살이 되는 해에 '기억 보유자'로 선정되어 그 전의 기억 보유자로부터 모든 기억을 전달받게 된다. 즉 세상의 모든 슬픔, 고통, 전쟁, 아픔, 색깔, 기쁨, 겨울눈의 촉감 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조너스는 이 사회의 평온한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며, 사람들에게서 제거된 감정과 색깔을 돌려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가 이 지역을 탈출할 때 그의 기억이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조너스는 성공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조너스의 탈출 후 그 사회는 아마 아수라장이 되었으리라. 평온의 무풍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고통, 슬픔, 아픔, 싸움,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감정들로 인해 사람들의 정신은 아득해져 있으리라. 그러나 저자는 그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들보다 진정한 사랑의 감정과 삶 속에서 느끼는 기쁨, 감사의 감정의 무게가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과감히 주인공을 탈출시켰으리라. 즉 사랑과 기쁨, 믿음과 소망의 감정이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 것이 아닐까?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인 기억의 파편 속에서 예쁘고 착한 기억들을 뽑아내어 한 편의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삶 속에 폭풍이 휘몰아칠 때, 그림 속에 그려진 벽난로가 타는 따듯한 집 안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힘든 세상이 좀 쉬워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