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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Oct 16. 2023

보이시고 나타내심

요한계시록 시각화

보이시고 나타내심


요한 계시록의 시각화

'사도 요한을 부르시는 어린양의 영광' 2022

작업 설명:

그리스도인이 된 후 20여 년동안 성경을 수십 번 읽었지만, 요한계시록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레위기'와 '몇몇 대-소예언서'와 '아가서'가 조금 어렵다 싶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 부분적인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뭐가 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나름 공부하면서  여러 해석들을 살폈지만 어느 것도 신빙성이 없어 보였고, 언제부턴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몇 해 전, 큰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복된 어느 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때때로 찾아왔고, '이 작은 책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주님 앞에 선다면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과 킹제임스 영문본을 반복적으로 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설교나 강해들은 어차피 소용없었기 때문에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영문본은 생소한 단어와 어휘를 찾으며 번역했고, 한글본과 대조했습니다. 성경 한글본에잘못된 번역이 제법 발견되었으나, 전체 맥락에는 큰 영향이 없는 듯했습니다.

다만, '제발 내 부끄러움을 감찰하시고 주님의 계시를 알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지만, '계시록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구조대로 각각의 내용들을 분류하고 또다시 번역을 고치며 필사를 반복했습니다. 이제는 어려운 단어와 어휘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체 흐름이 보였고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하루 종일 뛰고 구르고 춤추고 기도하면서 '주께 감사 감사 감사'를 외쳤습니다.


이어서 '교회역사'와 '유럽 역사'를 세밀하게 살폈고, '계시록의 역사관'과 비교검토했습니다. '계시의 상징'과 '역사적 사건들'의 대조를 통해 '매치되는 것'과 '차이 나는 것'이 구분되었습니다.


난해하기만 했던 '레위기'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 보였습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시로 묘사하고 있었고, 히브리어를 알면 더욱 잘 이해할 것이 분명했는데, 알파벳조차 메모리 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사야', '다니엘', '에스겔', '스가랴' 등에 있는 하나님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역사와 한 덩어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대-소 선지서들에 있는 신비'가 그때까지 지식적으로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시편은 애초부터 읽을 때마다 큰 감동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완전 새로운 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처음 나를 찾아주셨던 그날의 황홀경이 20여 년 만에 다시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 이해가 왜 그렇게나 어려운 건지 분명해졌습니다. 요한이 '눈으로 본 것을 글로' 남겼으니, '읽는 이'는 '본 사람의 그 감동과 이해'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내가 이해한 그것이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인지, 혹시 거짓의 아비가 속이는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내 공부 과정에 항상 깊이 관여하셨고,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본인의 수준에 맞춰서 가르쳐 주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자주 확인했고, 따로 증거도 보이셨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심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견해가 교회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생소한 것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 이므로 나와 같은 내용의 강해나 문건이 있는지 찾아봐야 했던 겁니다.

또한, 그때까지 살펴봤던 계시록 해석들은 대부분 '암호 해독에 성공했다'는 것이 전체 맥락이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볼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거짓이라 해서, 내 이해가 바르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미 나와 있는 계시록 강의와 문건들을 뒤져봤습니다. 전부 세세하게 읽기 귀찮아서 문단의 토픽만 확인하면서 맥락을 보고 넘겼는데, 최대한 많은 문건들을 살피기 위해서였습니다.


몇 개의 문건을 살폈는지 기억은 못하지만, 적어도 20건 이상은 살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내 이해와 동일한 강의 문건이 셋이나 발견되었습니다.

그중 한 목사님은 이미 40년 간 정통 계시를 전파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늦으나마, 그분 강의 대부분을 뒤져서 공부했고, 내 이해의 부족함과 아직 모르던 것까지 채우고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짓의 아비에게 속은 것이 아닌,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도 다시 검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오래된 짐꾸러미가 나타나서 정리를 했는데, 그 속에서 그 목사님의 강의 테이프가 나왔습니다. 그 테이프를 보자 그것을 누구에게 받았었는지도 기억이 났습니다.  

그때 그 테입을 주의 깊게 들었다면, 이미 15년 도 더 전에 계시록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내가 참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작업 리스트를 만들었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업이 진행될수록 넘기 힘든 벽이 점점 더 높아졌는데, 고증이 심각하게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래도, 요한이 본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그것은 그림이 하나 둘 완성되면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때문에 '주님 저에게도 그냥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입에 단 채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이 본 '일곱 금촛대'가 솔로몬 성전에 있던 그 '일곱 금등대 메노라'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됐습니다. 분명 연관성은 있지만, 메노라는 '기름 등'이고 요한이 본 것은 '촛대'였기 때문에 같은 것은 아니라는 추측이 고증에 대한 고민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 물어보니 '메노라가 맞다' 하셨는데, 내 대답은 '그렇군요' 했지만, 속에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금촛대만 아마 수십 개를 스케치했고, 20개가 넘는 촛대를 완성하면서 고민과 고증을 거듭했습니다.


결국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그렇다면 메노라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해야 하므로 12개의 가지로 만들어졌어야 하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그래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완벽한 고증은 아니지만, '둘은 다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메노라의 디자인과 달리 따로 분리된 각각의 '7개 금촛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완성되어 있던 많은 촛대들 중에서 7개를 골라서 배치해 봤는데, 그림이 조잡해졌습니다.

때문에 하나의 디자인을 선택하고 그 꼭대기에 서로 다른 상징 디자인을 넣어줬습니다. '다양성'은 창조 섭리의 속성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증을 살피다가 결국 불가능하다 생각되면, 내 디자인을 추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고민은 일곱 금촛대 하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어떻게 시각화할지, '입에서 나오는 양날 선 검'은?, '예수님 의상의 광채는 또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거리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그런 어려움들 때문에 거듭거듭 수정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사도 요한을 부르시는 어린양 예수' [2022년 그림], 을 앞서 첨부 공개합니다. 나름대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노력해서 완성했습니다만, 언젠가 또 고칠지도 모릅니다. 분명  포토샾이라는 훌륭한 툴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더욱 어려웠을 텝니다.

지금까지 완성된  여러 그림들에서도 고증 문제는 항상 높은 벽이었고, 작업 리스트 전체가 완성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또한, 재미를 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때마다 또 '그냥 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내 이해를 소개하면서 공개되겠지만, 언제 다 완성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완성되는 날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날에는 먼지 같은 내 인생의 전부를 드리는 감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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