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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용한 말은 어땠어요?

' 일상에 사용하는 언어가 삶의 깊이를 만듭니다.'

by 가치지기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아갈까요?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 평균 7,000에서 20,000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개개인의 성격, 직업,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한 권의 짧은 소설 분량 정도의 말이 매일 우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 수는 많아도, 실제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평균 800개에서 1,000개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인 성인은 약 2만에서 3만 개의 단어를 알고 있지만, 일상 대화에서 사용하는 어휘는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넓고 풍부한 언어의 바다를 품고도, 그중 작은 연못 안에서만 맴돌며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 많은 말을 하고도, 우리는 정작 어제와 다른 말을 오늘 얼마나 했는지, 무슨 표현을 새롭게 배웠는지 돌아보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마디의 말을 반복하면서도, 언어라는 넓은 세계를 가까스로 얕게 스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 시절, 잠시 미국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홀로 생활하며 외국어를 익히는 일이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일상에서 사용하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루틴처럼 굳어졌습니다. 아침 인사, 주문할 때 쓰는 말, 친구를 만날 때 건네는 짧은 인사와 농담들. 새로운 단어를 배우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언어의 틀 안에서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외국이든 한국이든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표현과 익숙한 단어 안에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직장에서는 정해진 업무 언어로 소통하고, 가정에 돌아와서는 피로와 무관심 사이에서 짧고 단조로운 말들로 하루를 정리합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합니다. 이렇게 제한된 언어 안에 머물다가, 아직 꺼내보지 못한 수많은 아름다운 표현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참 아쉬운 일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문학작품 속에는 우리가 평생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못했지만, 분명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는 말들이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깊은 문장 하나, 김훈 작가의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문체, 고은 시인의 짧지만 울림 깊은 구절들. 그들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일상의 말들이 얼마나 풍성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시를 통해 영혼의 언어를 만납니다. 드라마 속 인물의 대사를 따라 하며, 때로는 그 말에 위로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언어는 우리 삶을 다큐멘터리에서 드라마로, 감동의 무대로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음식은 다채롭게 먹고 싶어 하고, 여행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매일 쓰는 ‘말’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어제 했던 말, 오늘도 또 하고, 내일도 별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괜찮아”, “수고했어”, “밥 먹었어?”와 같은 말들은 따뜻하긴 하지만, 늘 똑같기에 생기를 잃어갑니다.


말은 감정의 전달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형태를 빚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마음의 품격을 드러내는 창입니다.


말에 품격이 있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우리는 그 품격을 억양이나 화려한 단어에서 찾으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품격은 ‘상대를 살리는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리고 ‘사유가 담긴 말’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매일 어제와 다른 음식을 먹고, 어제와 다른 날씨를 맞이합니다. 자연은 매 순간 새롭고, 우리의 몸도 매일 조금씩 변해갑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말은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는 어제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비슷한 감정 속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말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힘내요” 대신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해요”라고 건네보면 어떨까요? “괜찮아” 대신 “그 마음, 충분히 아파도 돼요”라고 진심을 담아 위로해 보면 어떨까요?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나 자신을 더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일 조금씩 새로운 말을 써보려 합니다. 시 속 문장을 흉내 내기도 하고, 오래된 책에서 건져 올린 표현을 일상에 적셔보기도 하며, 말이라는 도구를 통해 나의 삶을 조금 더 풍부하고 감동적으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다정하고 진심 어린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나는 어제와 다른 말을 했는가?

오늘 내 말은 누군가를 살렸는가?

오늘 내 말은 나의 마음을 밝혔는가?

이런 물음들은 내가 살아 있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성실히 써 내려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작지만 중요한 질문입니다.


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남고, 언젠가 다른 말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말을 시도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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