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국회 청문회에서 관봉권 띠지 분실 사건과 관련해 두 명의 수사관들이 나와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 명은 경력 6년 차 수사관, 다른 한 명은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이어졌다. 한국은행에서 발행되자마자 비닐 포장된 5만 원권 지폐 다발, 그것도 띠지에 한국은행 도장이 찍혀 있는 특이한 돈다발을 증거 처리하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이었다. 누구라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상황인데, 이를 모호하게 피해 가는 태도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자 두 수사관이 사전에 답변을 맞춘 정황까지 드러났다. 청문회 내내 고개를 숙이며 읽던 문서 속에는 국회를 모독하는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이런 기괴한 장면을 보며, 내란의 밤 이후 숱한 고비를 지나 여기까지 왔건만, 상식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일들이 여전히 지체되고 있는 이유들을 알게 되었다.
더 답답한 것은, 정의를 목청껏 외치던 이들조차 작은 약점이 드러나며 무너지고, 그 틈을 비집고 과거 내란을 동조하던 세력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문득 얼마 전 본 드라마 속 장면이 떠올랐다. 후배 변호사가 친구를 위해 양심에 어긋나는 변호를 해도 되는지 묻자, 선배 변호사가 “정의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답한다. 또 최근 한 정치 신인은 당 내부 문제로 정계를 떠나며 “정치 세계에는 거짓말이 너무 많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말처럼 정치판에서는 ‘내 편을 위한 거짓말’이 더 이상 잘못으로조차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가 당연시되고 있었다.
만약 그 내란이 성공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저항은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현실을 돌아보면 젊은 세대는 입시 경쟁 속에서 의대만이 유일한 생존책인 듯 몇 번의 재수를 감수하며 몰입하고 있다.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기득권이 되기 위해, 더 빨리 부자가 되기 위해 무한 질주를 시작한다. 넉넉한 집안은 차고 넘치는 자원을 자녀에게 쏟아붓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손녀를 위해 자본 세습을 준비하느라 노년에도 분주하다.
직장 문화도 달라졌다. 과거처럼 늦은 시간까지 몰입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다. 6시가 되면 엘리베이터 앞은 퇴근 행렬로 가득하다.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서는 젊은 직원도 드물고, 승진에 대한 열망도 옅어졌다. 임금 차이는 크지 않은데 책임과 스트레스를 굳이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목도하는 ‘현실사회’의 모습이다. 한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유행하며 사회적 담론을 형성했지만, 지금 내가 사는 현실에서 정의는 점점 다른 의미로 변질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다는 이유로 윤리도, 종교도, 양심도, 철학도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지켜내는 것이 정의라 여겨지는 세상이다.
물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은 정의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 때문에 법이 만들어지고,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질서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혹은 눈앞의 이해관계를 위해 스스로 소중히 지켜온 가치와 신념마저 버린다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눈앞의 쉬운 길을 택하는 순간,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대가는 훨씬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정의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에 갇히지 않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오늘따라 정의의 여신상이 눈을 가린 이유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그것은 단지 편견이나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 흔들릴 수 있기에 자신을 지키고, 공정한 판단 뒤에 흐르는 눈물을 가리기 위함이었다.